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값과 전세금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이른바 ‘깡통 전세’ 상태인 빌라 수백~수천 채를 굴리며 세입자들의 보증금 수백억원을 떼먹는 이른바 ‘빌라왕’ 일당이 잇따라 적발되고 있다. 28일 경찰청에 따르면 이날 기준 수도권과 광주광역시에서 100억원 이상 피해를 일으킨 빌라왕만 5명이 포착됐다. 이들이 사들인 빌라만 8000여 채에, 피해 액수는 1600억원 안팎에 달한다. 경찰은 전국적으로 10여 개의 거대 사기 조직이 있는 것으로 보고 수사망을 넓히고 있어, 다른 사기 행각이 더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현재까지 경찰은 전국에서 크고 작은 전세 사기 368건에 대해 834명을 검거했고, 397건에 대해서도 수사 중이다.
28일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임대사업자 이모(31)씨를 전세 사기 혐의로 구속하고, 그 일당 7명을 같은 혐의로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2018년부터 약 4년간 수도권에서 빌라 413채를 사들여 세를 놨다. 현재 이들이 떼먹은 전세금만 312억원, 피해자가 118명에 이른다.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지난 9월에는 수도권 일대에서 빌라 3493채를 굴리던 권모씨 등 일당 3명이 적발돼 구속됐다. 역대 가장 많은 깡통 빌라가 동원돼 ‘빌라의 신’으로 불렸다. 입건된 관련자만 200여 명이다. 그 밖에도 인천과 경기 일대에서 2700여 채를 굴린 ‘건축왕’ A씨, 수도권 일대에서 빌라와 오피스텔 1139채를 사들였고 지난 10월 숨진 채 발견된 ‘빌라왕’ 김모씨도 있다. 지난달 27일엔 광주광역시에서 2019~2020년 주택 434채를 이용한 사기 행각을 벌인 50대 정모씨 사건도 드러났다.
이들은 최근 몇 년간 주택 가격 급등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세를 찾는 수요가 많다는 점을 노려, 집값·전세금 차이가 적은 빌라 등을 산 뒤 집값보다 전세금을 더 올려 받는 이른바 ‘무자본 갭 투자’ 수법을 썼다. 세입자가 낸 전세금으로 빌라를 사고, 빌라 가격이 오르면 그 빌라를 팔아 돈을 벌거나 빌라 분양 업자들에게서 수수료를 챙기는 식이다. 경찰은 빌라 분양 업자와 빌라 수백 채를 보유한 이른바 빌라왕들, 일부 공인중개사 등이 조직적으로 사기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고 있다. 이른바 ‘동시 진행’이란 수법을 쓰는 것도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우선 공인중개사 등이 미분양됐거나 불법 개조한 빌라에 거주하려는 세입자를 구한다. 그리고 이 세입자에게 빌라를 팔아넘기고 싶은 건축주와 전세 계약을 맺게 하는 것이다. 그다음 ‘빌라왕’ 역할을 맡은 사람이 이 건축주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빌라 명의를 넘겨받는다. 세입자의 전세금은 빌라 건축주 주머니로, 빌라왕은 빌라 소유권과 수수료를 받는 구조다. 1채당 500만~800만원의 수수료가 오간 사건도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세입자는 ‘내가 거주하는 빌라가 다른 사람에게 팔렸구나’라는 사실을 알고 새로 계약서를 체결할 뿐, 바뀐 집주인이 보증금을 갚을 여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택 경기가 식으면서 집값·전세금이 동반 하락하자, 세입자들에게 전세금도 돌려주지 못하게 됐고 사기 행각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신축 빌라를 이용한 사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신축 빌라의 경우 현행법상 30가구 미만일 때 준공일 이전 매매계약은 거래가액을 신고하지 않아도 돼 실제 매매 가격을 임차인들에게 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피해자 대부분은 20~30대로, 이들은 사실상 전 재산인 보증금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다. ‘빌라의 신’ 권씨로부터 피해를 입은 김모(32)씨는 “계약 당시 등기부등본은 별문제가 없었는데 정작 잔금을 치르려니 집주인이 권씨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김모(28)씨도 “공인중개사가 신축 빌라를 보여주며 보증보험에 이자 지원도 해주겠다며 계약을 권해 따랐는데 결국 한통속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