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제)’ 대비가 대치동 학원가의 핵심 콘텐츠로 자리 잡은 뒤 의대 등 명문대 학생들이 ‘틈새 고액 알바’로 뛰어든 킬러 문항 제작 시장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유명 입시학원들은 킬러 문항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고 고액 상금을 내걸고 공모전까지 열었고, 다른 학원의 ‘콘텐츠 조교’를 잡으려고 스카우트 전쟁도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킬러 문항 배제 방침 이후 사교육 업계는 ‘준킬러’ 대비로 방향을 틀어 대비에 나섰다.
18일 본지 취재에 응한 킬러 문항 출제 알바 대학생들은 “일반 아르바이트보다 더 많은 돈을 상대적으로 쉽게 벌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의대에 진학한 A(21)씨는 삼수를 준비하며 유명 입시학원 강사의 콘텐츠 조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강사가 채용을 제안했다”며 “반년에 650만~750만원을 벌 수 있어 좋은 알바”라고 했다. 일반 난이도의 3점 문항은 하나당 5만원부터 시작하지만, 킬러 문항에 해당하는 고난도 문항은 20만원 넘게 받았다고 했다. A씨는 “내가 속한 학원에만 이런 콘텐츠 조교가 100여 명”이라며 “‘사교육 강사’로 진로를 정하고 조교로 경험을 쌓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학원들은 수험생이 모인 온라인 사이트와 카페에서 문항 출제 알바를 ‘스카우트’했다. 한 과학기술원 수학과 학생인 B(24)씨는 “네이버 카페에 내가 만든 수학 문항을 올린 뒤 대형 학원에서 두 차례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고 했다. 올해 탐구 영역 문항을 학원에 제공한 대학생 C(23)씨는 “학원 소셜미디어 계정이나 교재에 출제 알바를 공개 모집하는 것도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유명 학원들은 ‘킬러 문항 공모전’을 정기적으로 열었다. 학생이 제작한 킬러 문항이 해당 학원 문제집에 수록되면, 저작권 포기를 전제로 문제 하나당 50만~75만원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름이 알려진 다른 학원 출제진을 빼내 오는 일도 흔하다고 했다.
유명 입시학원과 강사들은 문항 출제를 전담하는 콘텐츠 조교를 수십~100여 명씩 두고, 수능 맞춤형 대비 문제를 쏟아낸다. 출제 알바생들은 평가원의 최신 모의고사와 수능 문제를 반복 연구한다고 했다. 최신 동향에 맞되, 학생들이 어렵다고 느끼는 문제를 만드는 게 핵심이라는 것이다. 의대생 D(20)씨는 “고교 교육과정을 벗어나지 않는 게 1순위 원칙”이라며 “여러 개념을 복잡하게 섞거나 개념을 낯선 방식으로 제시하며 문제를 만들면 난도가 높아진다”고 했다. 특히 이런 개념을 대학 교재나 논문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 찾아보고 문제 출제에 활용하면 정답률이 확 떨어진다고 했다. 2021~2022년 모의고사 국어 지문·문항 출제자로 일한 E(25)씨는 “미시·거시경제, 민법원론, 심리학 전공서 등에서 지문을 발췌했다”고 했다.
최근 정부가 ‘수능 킬러 문항 배제’ 방침을 강력히 밝히자 학원가에서는 ‘준킬러 문항’ 대비에 돌입했다. 의대생 A씨는 “대학에 서열이 있고, 상위권 학생을 어떻게든 변별해야 하는 대입 구조가 여전한 만큼 준킬러 문항이 빽빽하게 출제돼 체감 난도가 더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수학과 B씨는 “쉬운 문제, 어려운 문제 구분은 없애되 계산 과정이 긴 문제를 다수 출제하는 등 방식으로 난도를 높일 것”이라며 “이런 전망에 맞춰 출제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문제 풀이에 단련된 학생들을 변별하려니 꼬이고 꼬인 문제가 출제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D씨는 “최근 의대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탐구 영역의 경우 ‘문제를 위한 문제’가 많아 기괴하게 느껴진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수능 출제위원들은 시중 유명 수험서나 사설 모의고사, 유명 강사 강의 교재를 모두 검토해 겹치지 않는 문제를 낸다고 알려져 있다. E씨는 “학원가에서 평가원을 모방해 수천 개를 쏟아부으니 킬러 문항이 더 꼬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결국 그 피해는 수험생들이 보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