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핼러윈 참사가 오는 29일로 1주기를 맞는다. 참사 직후 과도한 밀집 문화와 인파 관리 부실 등 안전 질서 전반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당시엔 부각되지 못했지만, 전문가들은 우측통행과 같은 기초 질서가 지켜졌다면 참사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우측통행 등 일상의 기초 질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정치권이 정쟁에 휘말려 문제를 방치한 탓이다.
1921년부터 시행돼 오던 ‘좌측통행’은 2010년 우측통행으로 바뀌었다. 바뀐 통행 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으면서 사람들은 제각각 좌측 또는 우측통행을 하고 있다. 안전 전문가들은 “우측통행 문화가 정착된다면 대다수 인파(人波)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같은 길이라도 우측통행이 이뤄지면 25%의 보행자가 인파 사고 없이 더 통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본지가 지난 9~10월 출퇴근 지하철역과 시내 번화가, 국제 행사장 등을 돌아본 결과 우측통행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일부 시민은 우측통행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좁은 골목이나 지하철역을 오가던 시민들끼리 부딪치거나 사고가 발생할 뻔한 아찔한 장면도 목격됐다.
지난 19일 오후 7시 서울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 승강장은 승하차 승객들로 혼잡했다. 승객들은 따로 우측통행을 하지 않았다. 이들이 뒤엉키면서 열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승객도 생겼다. 열차 안 시민들은 “내릴게요!”를 반복해서 외쳤다. 지난 20일 오전 8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 환승 계단에서는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이 경광봉을 흔들며 우측통행을 유도하고 있었다. 계단 바닥에는 우측통행을 유도하기 위해 화살표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승강장에 열차가 도착하자 한꺼번에 많은 승객이 계단에 몰렸고 우측통행은 지켜지지 않았다. 안전 요원들은 “줄 서세요. 오른쪽으로 가세요. 부딪쳐!”라고 소리쳤다. 지나가던 승객 중 일부는 “출근하느라 바쁜데 우측통행으로 느릿느릿 갈 시간이 어디 있나”라고 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상황도 비슷했다. 역사 측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우측통행을 할 수 있도록 별도의 통제선을 만들었지만, 앞사람을 추월하기 위해 통제선을 넘어 역행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지하철 경찰대원 김모(44)씨는 “대부분 승객들이 지시에 잘 따르긴 하지만 열차를 타기 위해 방향 상관없이 뛰어올라가는 시민들이 있다”며 “자칫 사고가 날까 가슴이 철렁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14일 자정 무렵.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2번 출구 인근 클럽에서 댄서 한 명이 나와 춤을 추자 이를 보기 위해 수십 명의 시민이 거리로 몰렸다. 핼러윈 참사가 발생했던 골목 교차로는 공연을 보기 위해 이동하는 시민과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엉켜 막힘 현상이 발생했다. 몰려든 인파는 우측통행을 하지 않았고, 서로 어깨가 부딪쳤다. 일부 주점 직원들의 길거리 호객 행위도 무질서한 통행을 부추겼다. 경기도에 사는 김모(31)씨는 “핼러윈 참사 때 우측통행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라고 했다.
지난 13일 밤 11시 서울 마포구의 클럽 거리에서도 우측통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클럽 입구마다 각각 10m 정도의 입장 대기줄이 있었는데, 골목의 폭은 3m 정도로 핼러윈 참사가 일어난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의 폭(4m)보다 좁았다. 그런데 흡연하는 이들과 입장 대기 인원이 섞이면서 골목 폭이 좁아졌고 우측통행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이모(26)씨는 “우측보행을 어렴풋이 들은 것 같긴 한데 항상 클럽 거리는 카오스(혼돈) 상태”라며 “골목을 지날 때마다 옆 사람과 부딪힐 때가 많은데 사람들이 더 빡빡하게 모이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국제 행사장에서도 통행 문화는 무질서했다. 지난 21일 2023 국제항공우주·방위산업 전시회(ADEX·아덱스)가 열린 경기 성남 서울공항 활주로는 개장 시간이었던 오전 9시 30분쯤부터 관람객으로 붐볐다. 이날 하루에만 7만여 명이 방문했지만, 우측통행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안전 요원이 있었지만, 우측통행을 안내하지는 않았다. 인파로 인해 사람들은 서로 몸이 부딪쳤다. 가족들과 행사장을 찾은 박모(47)씨는 “관람객을 끊어서 입장시키거나 한 방향으로 통행시키는 등의 조치가 전혀 없었다”며 “키가 작은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도 많았는데 위험해 보였다”고 했다. 성남시는 이날 오후 3시 ‘행사장에 인파 밀집이 발생해 안전사고 위험이 크므로, 노약자분은 주변 접근 및 통행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자를 발송했다.
지역 축제에서도 우측통행은 없었다. 지난달 17일 오후 ‘제23회 소래포구 축제’가 열린 인천 남동구 소래포구 해오름광장 옆 차로 인근은 광장 안 무대 공연을 관람하기 위한 인파로 가득 찼다. 방문객들의 통행로로 사용 중이었던 도로는 공연 관람 인파로 통행이 어려웠고, 우측통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현장에 배치된 안전 요원은 대부분 무대 인근에 있었고 통행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울에서 축제를 보러 왔다는 김모(23)씨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며 지나다니는 와중에 주변 구조물을 밟고 서거나 목말을 탄 어린이들도 있어 위험해 보인다”고 했다.
정부는 우측통행 준수율을 높이기 위한 캠페인에 나섰지만 정작 그 사실을 아는 시민들은 드물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 8월부터 일상 안전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11개 실천 과제 중 하나로 ‘우측통행 준수’를 제시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등에 우측통행의 필요성을 강조한 영상도 올렸다.
우리나라가 우측통행을 도입한 이유는 보행자 사고, 교통사고 감소를 위해서였다. 1921년 일제에 의해 좌측통행이 시행됐고, 보행 안전 개선을 위해 89년 만인 2010년 우측통행을 도입했다. 오른손잡이가 많은 우리나라의 경우 우측통행을 할 경우 보행자 간 충돌이 줄고 보행 속도도 빨라질 것으로 예측됐다. 우측통행을 하면 도로 옆 인도에서 보행자가 차량을 마주 보며 걸어가게 되면서 교통사고도 약 20% 감소할 것으로 추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