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최모(19)씨는 두 나라에 모두 출생신고가 됐지만 한국 국적을 기준으로 살아왔다. 한국에서 초·중·고를 다녔고 주민등록증도 받았다. 한국 여권으로 5차례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올해 초에는 병역을 위한 신체검사도 받았다.

그런데 최씨는 군 입대를 위해 지난 6월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려고 출입국 사무소에 갔다가 ‘불법체류자’ 통보를 받았다. 한국 국적은 없고 러시아 국적만 가진 상태에서 불법체류했다는 판정이었다. 최씨는 “평생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왔는데 황당하다”고 했지만 한국 국적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구청과 주민센터에서도 “여권과 주민등록증을 잘못 발급해줬다”고 했다.

최씨처럼 한국·러시아 국제결혼 부부의 자녀들이 자신도 모르게 불법체류자가 된 사례가 최대 1만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 2002년 러시아가 국적법을 개정하면서 시작된 일이라고 한다. ‘러시아 영토 외에서 태어난 경우 국적은 후천적으로 부여한다’는 조항이 신설되면서 출생신고를 하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게 됐다. 그러면서 ‘후천적으로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하면 한국 국적은 자동 포기된다’는 우리 국적법과 충돌하는 문제가 생겼다. 최씨도 2004년 한국에, 2006년 러시아에 차례로 출생신고를 했다가 러시아 국적을 얻고 한국 국적은 잃은 것이다. 그는 “러시아 국적법이 바뀐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며 “나 같은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국적 회복 과정도 복잡하다. 먼저 한국 국적 상실 신고를 하고 외국인 체류 자격 비자를 받은 상태에서 한국 국적 회복 신청을 해야 한다. 이 절차에 평균 8개월 이상이 걸린다. 불법체류에 따른 과태료도 최대 3000만원까지 물게 된다. 한·러 부부로 미성년 자녀의 한국 국적을 회복하는 과정에 있다는 A씨는 “과태료를 낼 형편이 안 돼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전했다.

대구에서 다문화 관련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이나현 오디에스 대표는 “러시아 국적법 개정 이후 20년이 지났지만 지역이나 기관마다 설명도 제각각이고 제대로 된 정보도 공유되지 않아 자신도 모르는 채 불법체류자가 된 피해자들이 계속 생기고 있다”며 “법 제도가 충돌하면서 생긴 특수한 경우인 만큼 국적을 회복하려는 한-러 가족들에게 절차 간소화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