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인 25일 새벽 서울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30대 남성 둘이 사망하고 주민 30명이 부상했다. 숨진 남성 중 한 명은 불길을 피하려고 7개월 된 아이를 안고 아파트 4층에서 뛰어내렸다. 아이는 살았지만 아버지는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옥상으로 대피하다 11층 비상계단에서 발견된 다른 사망자는 불이 나자 가족을 모두 대피시킨 뒤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다고 한다. 이 사람의 70대 부모와 동생은 살아남았다.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새벽 4시 57분쯤 서울 도봉구 방학동 23층짜리 아파트 3층의 한 집 작은 방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집에 살던 70대 부부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건졌다.
불은 바로 위층으로 빠르게 번졌다. 4층에는 30대 부부가 각각 두 살, 7개월 된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거센 불길이 올라오자 아내 정모(33)씨는 경비원들이 대피를 도우려고 바닥에 갖다 놓은 재활용 포대에 두 살 딸을 던진 뒤 자신도 뛰어내렸다. 아이는 재활용 포대 위에 있던 경비원이 받았다고 한다.
이어 남편 박모(32)씨가 7개월 아이를 이불로 감싸 안은 뒤 재활용 포대 위가 아닌 딱딱한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당시 상황을 지켜본 아파트 관계자는 “4층이 불길에 휩싸인 급박한 상황이었다”며 “아내가 있던 포대 위 자리가 부족해 남편은 맨 바닥에 뛰어내렸다”고 전했다. 그는 “박씨가 떨어진 뒤 아이가 박씨의 품에서 튕겨져 나왔다”고도 했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박씨는 현장에서 숨졌지만, 아내 정씨와 두 딸은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소방은 사건 발생 5분 뒤인 새벽 5시 2분에 도착했다. 소방서 관계자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불길이 상당히 컸다”며 “박씨 부부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경비원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고 했다.
또 다른 사망자 임모(37)씨는 아파트 11층 계단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10층에 살던 임씨가 불길을 피해 옥상 쪽으로 올라가려다가 연기에 질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임씨의 아버지는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을 다 살리고 네가 죽으면 뭐 하나”라며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나”라고 했다.
25일 오전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아파트 화재 현장 외벽은 까맣게 불타 있었다. 아파트 3층부터 17층까지 그을린 자국이 보였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이날 화재 최초 신고자는 ‘아파트 10층 주민’이라고 밝힌 사망자 임씨였다. “아래에서 연기가 올라온다”고 신고한 임씨는 11층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아파트 3층에서 시작된 불길은 아파트 6~7층까지 태웠다. 유독가스는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을 통해 아파트 최상층인 23층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아파트 주민들은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만큼 불이 빠른 속도로 번졌다”고 했다. 주민 A(58)씨는 “5시 10분쯤 불이 났으니 대피하라는 방송을 듣고 잠에서 깼다”며 “남편과 함께 대피하려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열기와 유독가스가 들어와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고 했다. A씨는 “도저히 밖으로 나갈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해 집에서 수건에 물을 묻혀 입과 코를 막고 베란다에서 구조를 기다렸다”고 했다. 9층에 사는 주민 김모(51)씨는 “새벽에 ‘불이야’라는 소리를 듣고 바깥을 보니 소방차가 여러 대 와 있었다”며 “바깥으로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베란다에서 아내와 함께 구조를 기다렸다”고 했다. 21층에 사는 한 주민은 검은 재로 덮인 자전거를 닦으며 “안내 방송을 듣고 문을 열었더니 뜨거운 열기가 확 들어차서 ‘나가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집에 머물렀다”고 했다.
아파트 관계자는 “갑자기 ‘빵’ 하고 가스 폭발음 같은 터지는 소리가 난 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며 “현장에 도착해 보니 3층에서 불꽃이 튀어나오고 있었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제가 왔을 때 1층 바닥에는 핏자국이 흥건하게 남아 있었고, 사람들을 들것에 실어 이송하고 있었다”고 했다.
불길이 빠른 속도로 번진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방화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경찰은 이번 화재가 범죄일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방화 등 범죄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26일 오전 합동 현장 감식을 해 정확한 발화 지점과 화재 원인 등을 규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스프링클러나 화재 경보기 등 이 아파트에 설치된 화재 관련 장비는 정상 작동했지만 여러 허점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아파트는 2001년 준공한 아파트여서 16층 이상에만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었다. 화재 경보기도 화재 발생 가구 바로 위아래 한 층만 울리게 돼 있었다. 대다수 주민은 관리사무소의 방송을 듣고 대피하려 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복도에 유독가스가 가득 차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베란다에서 구조를 기다렸다.
제진주 전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층별로 계단에 있는 방화문을 잘 닫아뒀더라면 위쪽으로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가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화재 경보기가 울리면 방화문이 자동으로 닫히도록 연동하는 시스템을 설치하거나, 평소에 방화문 잘 닫고 다니기를 생활화해야 한다”고 했다.
불이 난 아파트 1층 공간이 트인 ‘필로티’ 구조여서 화재에 취약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부 교수는 “1층이 비어 있는 필로티 구조 특성상 출입구로 외부 공기 유입이 활발해 불이 빠르게 확산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했다.
발화 지점인 아파트 3층의 김모(77)씨 부부는 화재 발생 직후에 밖으로 뛰어내려 목숨을 구했다. 또 다른 70대 주민 A씨는 20층 계단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으나, 심폐 소생술로 목숨을 건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아파트 주민 200여 명이 대피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오후 페이스북을 통해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성탄절 연휴에 서울 아파트 화재 현장을 비롯해 많은 곳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며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슬픔에 잠겨 계실 유가족 여러분께 위로 말씀을 드리며 사고로 부상한 분들의 쾌유를 기원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