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강아지가 아픈데 좀 봐줄래?”
2007년 12월 25일 해질 무렵 경기 안양시 주택가 골목에서 열살, 여덟살 두 여자 어린이에게 동네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곳곳에서 캐럴이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아저씨는 술과 본드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어린 두 소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아픈 강아지’를 보살펴주고 싶다는 마음에 이끌려 남자를 따라갔고,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두 아이는 조각조각 난 시신이 되어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두 아이를 데려간 남자는 이 동네에 사는 서른여덟살 정성현. 대학졸업 후 10여년간 대리운전과 컴퓨터조립 등으로 하루 번 돈을 그날 쓰며 사는, 그런 인생이었다.
이날도 아침 7시까지 대리운전을 했다. 밤새 술마신 손님들의 호출이 더는 오지 않자, 정성현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인과 해장국집에서 소주를, 그 다음엔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맥주를 마셨다. 그리곤 빈집으로 돌아왔다. 오전 11시였다.
원래 집엔 함께 살던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1년전 알코올성 간질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정성현은 혼자가 됐다.
빈집에 돌아온 정성현은 또 소주를 땄다. 그걸 다 마신 뒤에는 본드를 불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의 하루가 저물어 가던 오후 5시30분, 정성현은 집을 나섰다.
집 앞 삼거리에서 10살 이모양과 8살 우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강아지가 아픈데 좀 봐줄래?”
애초 강아지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순수했던 아이들은 그대로 정성현의 집으로 따라갔다. 둘은 현관문 틈으로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어 집안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아저씨, 근데 왜 강아지가 안 보여요?”
그러자 정성현은 뒤에서 두 소녀를 밀쳐 집 안으로 들여보냈고, 재빨리 따라 들어가 현관문을 잠갔다.
그리곤 다시 작은 방으로 두 아이를 밀어넣은 후 문을 닫았다.
아이들의 저항은 부질없었다. “도와주세요” “사람살려요”라는 목소리는 방문과 현관문을 너머 세상으로 닿지 않았다.
“조용히 해, 가만히 있지 않으면 집에 안 보내줄 거야”
그리곤 아이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술과 약물에 취한 채 아이들의 저항을 누르려고 안간힘을 쓰던 정성현에게, 문득 ‘들키면?’이란 생각이 찾아왔다.
그때였다. 아이들을 죽여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정성현은 왼손으로는 우양의 가슴을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코와 입을 막았다. 그렇게 우양이 의식을 잃자, 이번엔 이양 가슴 위에 올라탔다. 무릎으로 양팔을 누른 뒤 마찬가지로 코와 입을 힘껏 막았다.
살인 직후, 정성현은 곧바로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우선 집에서 먼 거리에 있는 철물점에서 톱을 사왔다. 그 톱으로 싸늘해진 아이들의 시신을 발목, 무릎, 허벅지 등으로 잘라냈다. 이후 렌터카를 이용해 시신 조각들을 각각 시흥시 정황동의 하천, 수원시 권성동의 야산에 유기했다.
다음날 정성현은 태연했다. 지인의 컴퓨터를 고쳐줬고, 오후 3시쯤에는 시신을 옮기는 데 사용한 렌터카를 반납했다. 두 아이의 부모 속은 타들어 갔지만, 정성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정성현은 완전 범죄를 꿈꿨으나, 결국 실패했다.
“으악, 이거 사람 머리 아닙니까?”
2008년 3월 11일. 땅 위로 노출된 머리가 수원시 권선구에서 훈련 중이던 예비군 눈에 들어왔다. 예비군은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DNA 검사 결과 해당 시신이 이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시신은 10개 부위로 토막 나 30㎝ 깊이로 암매장되어 있었다.
경찰은 이양 시신이 발견된 뒤에야 정성현을 주요 용의선상에 올렸다. 렌터카 트렁크에 남은 혈흔이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결국 정성현은 3월 16일 충남 보령의 어머니 집에서 체포됐다. 범행 82일만이었다.
정성현을 더 일찍 잡을 기회가 있었다. 실종 며칠 뒤인 1월 초, 정성현의 이웃 주민 김모(54)씨가 정성현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이를 경찰에 알렸다.
김씨는 3년전 정성현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일이 있어 정성현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실종 사건 뒤부터 공교롭게 정성현 행동이 평소와 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정성현에게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다.
정성현은 체포 뒤에도 여러차례 말을 바꾸며 수사에 혼선을 줬다.
“교통사고로 두 어린이를 죽였다” “아이들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반항해서 죽였다” “담배를 사러 집을 나왔다가 두 어린이를 마주치곤 어깨에 손을 얹었는데, 소리치며 반항해 양손으로 입과 코를 막고 벽으로 밀어붙여 죽였다”
체포 뒤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기간 동안 번복된 진술들이다. 그는 아직 찾지 못한 우양의 시신을 시화호에 버렸다고 했다가, 또 오이도에 묻었다고 했다.
결국 우양 시신은 18일 정왕동의 군자천을 수색하던 해병대 전우회 회원에 의해 발견됐다. 하천 곳곳에 여기저기 흩어진 탓에, 시신은 온전하게 회수되지도 못했다.
부모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양 어머니는 안양경찰서 게시판에 이렇게 적었다.
“개천의 물을 다 퍼내는 한이 있어도, 시화호 물을 다 퍼내는 한이 있어도, 그게 어려우면 잠수부를 동원해서라도 우리 딸(우양)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머니의 호소에도 우양 시신 일부는 끝내 찾지 못했다.
정성현의 집 컴퓨터에서는 음란물 1400여개가 발견됐다. 이 가운데 수백개가 미성년자의 나체 사진 또는 아동 포르노물이었다. 가학 영상물도 있었다.
아동 포르노물 소지에 관한 경찰관 질문에, 정성현은 이렇게 답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 아닌가요. 형사님도 포르노 보면 더 자극적인 걸 원하잖아요?”
경찰 수사과정에서 정성현의 숨겨진 살인 1건이 추가로 드러났다.
2004년 군포에서 살해된 전화방 종업원 A(43)씨를 살해한 것도 정성현이었다.
성매매 흥정 과정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얼마인지 알지?” (A씨)
“10만원 아니냐?” (정성현)
“아니, 17만원이야” (A씨)
이런 대화 끝에 정성현은 손바닥으로 A씨 뺨을 2~3회 때렸고, A씨가 방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하자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다. A씨가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심하게 부딪혀 실신했음에도, 정성현은 멈추지 않았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양손 주먹으로 A씨 얼굴을 5분에 걸쳐 수십차례 내리쳤다. A씨는 그 자리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이 때도 정성현은 사체를 토막 내 암매장했다.
당시 경찰은 정성현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여러번 불러 조사했지만 정성현에게 혐의를 적용하진 못했다.
2009년 2월 26일, 대법원은 정성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이렇게 판시했다.
“피고인이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보이는 진술 태도에 비추어 진심으로 그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지에 대하여 의심이 가고, 오히려 여성 및 사회를 탓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개선교화의 여지도 거의 없고, 또한 동일한 범행을 반복한 점에 비추어 재범의 위험성이 매우 큰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조치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내용 그대로였다. 정성현은 교도소에 간 뒤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복역 중이던 2012년 “수사 과정에서 협박당해 누명을 썼다”며 국가 등을 상대로 4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2015년 허위 보도로 피해를 봤다며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당연하게도 모두 패소했지만, 이후에도 고소를 남발했다. 2017년 자신을 ‘살인마’라고 표현한 경기지역 신문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이 고소는 검찰로부터 각하됐다.
단란하고 화목했던 우양과 이양 가정은 정성현에 의해 피폐해졌다. 이양 아버지는 2014년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다. 사건 이후 매일 술에 의존했던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가족들은 말했다. 우양 가족은 장례를 마친 뒤 다른 동네로 이사간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