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의 신림동 고시촌 길목에서 KB금융그룹과 KT가 운영 중인 창업지원센터 빌딩. 대기업들이 나서 6층짜리 유명 고시학원을 스타트업 허브로 만들었다. 이곳엔 유명 베이글 맛집인 ‘런던 베이글 뮤지엄’ 운영회사 등 17개 스타트업이 입주해있다. /최종석 기자

지난 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 고시원과 독서실, PC방 등이 몰려 있던 골목에 ‘벤처창업센터’ 3곳이 나란히 들어서 있었다. 관악구가 스타트업을 발굴, 지원하기 위해 작년 초 고시원, 독서실 건물 3채를 통째로 빌려 벤처창업센터를 연 것이다. 관악구 관계자는 “2017년 사법시험 폐지 이후 침체했던 고시촌 일대를 되살리기 위해 창업지원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요즘은 ‘창업촌’으로 불릴 만큼 2030 창업자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했다.

다닥다닥 고시원과 독서실이 밀집해 있던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이 스타트업 창업가들의 ‘창업촌’으로 바뀌고 있다. 최근 4년 새 구청이나 대기업 등이 마련한 창업지원센터 9곳이 문을 열었고, 89개 기업이 새로 생기거나 옮겨왔다. 이들 기업 직원 수만 797명에 달한다.

골목 입구에 있는 6층짜리 유명 고시학원 건물은 대기업 스타트업 허브로 변신했다. KB금융그룹과 KT가 지난 2021년 각각 ‘이노베이션 허브’와 ‘KT브릿지랩’이라는 창업센터를 열었다. 스타트업들을 위해 ‘공유 사무실’로 만든 것이다. 현재 유명 베이글 맛집인 ‘런던 베이글 뮤지엄’을 운영하는 ‘엘비엠’, 다양한 전통주 구독 서비스를 개발한 ‘매월매주’ 등 17개 스타트업이 입주 중이다. KB금융그룹 관계자는 “공간 제공은 물론 스타트업들의 투자 유치나 경영 컨설팅도 돕는다”고 했다.

그래픽=양진경

또 다른 고시촌 건물에는 우리금융그룹이 2021년 문을 연 스타트업 육성 센터 ‘디노랩’이 운영 중이다. 여기엔 AI와 헬스케어, 모빌리티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 14개가 자리 잡고 있다.

젊은 창업가들이 몰리면서 디저트 카페나 샐러드 가게도 늘었다. 한 카페 주인은 “몇 년 전만 해도 공부하는 손님들뿐이었는데 요즘은 노트북 들고 와서 회의를 하는 손님이 많다”고 했다.

신림동 고시촌의 변신은 관악구와 서울대가 2020년 창업지원센터를 만들면서 시작됐다. 관악구 관계자는 “미국 실리콘밸리도 스탠퍼드대를 끼고 있으니, 서울대 옆 신림동도 젊은 인재들이 모이는 곳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로 시작했다”면서 “이런 기대가 적중해 3~4년 만에 몰라보게 바뀌게 됐다”고 했다.

특히 2022년 고시촌 앞에 경전철 신림선이 놓이면서 창업촌은 급속히 커졌다. 역 이름도 당초 ‘고시타운역’이 거론되다가 ‘서울대벤처타운역’으로 바꿨다. 신림선 개통 당시 하루 평균 이용객 수는 7200여 명이었는데 요즘은 1만명이 넘는다. 이런 붐을 타고 관악구와 서울대는 낙성대입구 등 관내에 흩어져 있는 창업센터들을 하나로 묶어 ‘S밸리’라는 새 이름도 붙였다.

신림동을 찾는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저렴한 임차료와 편리한 교통, 서울대 접근성 등을 장점으로 꼽는다. 지난해 성수동에서 신림동으로 이사 온 로봇 스타트업 ‘크레오코리아’의 박성철(38) 이사는 “성수동에선 20평 사무실 월세가 200만원이 넘었는데 여기는 30평짜리 사무실 월세가 35만원 수준”이라며 “고시촌이라 가능한 월세”라고 했다.

마포구 홍대 입구에서 이사 왔다는 예술가 매니지먼트 스타트업 ‘레드슬리퍼스’의 이성환(28) 대표는 “신림선이 개통하기 전에는 교통이 불편한 변두리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이제는 여의도까지 16분, 강남까지 24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신림벤처창업센터'에서 '로맨시브' 이수현(26·가운데) 대표가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이 회사는 서울대와 함께 수면을 도와주는 음료를 만든다./박진성 기자

서울대와 기능성 음료를 공동 개발해 판매 중인 ‘로맨시브’의 이수현(26) 대표는 “임상시험 등 서울대와 협업할 일이 많은데 여기가 딱”이라고 했다. 관악구는 최근 새로 입주할 스타트업 50곳을 모집했는데, 그중 절반이 서울대 학생이나 교수가 창업한 스타트업이었다고 한다.

관악구는 S밸리의 몸집을 키워 고시촌과 낙성대 일대를 ‘제2의 판교’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창업지원센터도 3곳 더 지을 예정이다. 올해 초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에 ‘관악S밸리’ 부스도 열었다. 고시촌 스타트업들이 이 부스에서 해외 바이어들을 만났다.

박준희 관악구청장은 “2026년까지 스타트업 1000곳과 투자 2000억원을 유치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