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 유승민(43) 전 대한탁구협회장이 차기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됐다. 유 전 회장은 14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총 투표 수 1209표 중 417표(득표율 34.5%)를 받아 이기흥(70) 현 체육회장(379표·31.3%), 강태선(76) 서울시체육회장(216표·17.9%) 등을 제치고 당선됐다. 당초 이번 선거는 3선을 노리는 이 현 회장이 유리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이 회장이 체육회장으로 재임(8년)하는 동안 다져놓은 입지가 탄탄한 데다 ‘반(反)이기흥’을 앞세운 후보들 간 단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표가 흩어져 이 회장이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젊은 선거인단들이 이 회장이 받고 있는 부정 채용과 횡령 등 각종 비리 혐의에 대해 염증을 낸 데다 유 후보가 선거 기간 내내 발로 뛰면서 표밭을 다진 효과가 발휘됐다는 분석이다.
이번 선거에선 유승민, 이기흥, 강태선에 이어 강신욱(70) 단국대 명예교수가 120표, 오주영(40) 전 대한세팍타크로협회 회장이 59표, 김용주(64) 전 강원도체육회 사무총장이 15표를 얻었다. 선거인단 2244명 중 1209명이 참여, 투표율은 53.9%를 기록했다.
◇선수 출신 체육회장… 아테네 올림픽처럼 역전 드라마 썼다
유 당선인은 체육회 대의원 총회와 문체부 장관 승인을 거쳐 다음 달 28일 4년 임기를 시작한다. 임기는 2029년 2월까지다. 임기 내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2026년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2028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등 굵직한 국제 대회를 준비해야 한다.
유승민 당선인은 잘 알려진 올림픽 영웅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결승에서 세계 최강 중 한 명인 중국 왕하오를 꺾고 금메달을 땄다. 이전까지 성인 무대에서 6전 6패를 당했던 왕하오에게 결정적인 순간 설욕했다. 마지막 ‘금빛 드라이브’를 성공시킨 후 김택수 코치에게 안겨 펄쩍펄쩍 뛰던 모습은 한국 올림픽 역사 명장면 중 하나로 남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유남규(남자단식), 양영자·현정화(여자복식) 이후 16년 만이자 한국 탁구 역사 마지막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2014년 현역 은퇴 후 국가대표팀과 삼성생명 탁구단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2016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선수 위원에 당선되면서 체육 행정가 길로 접어들었다. 선수 위원은 2016년 리우 올림픽에 출전한 각국 선수단 투표로 뽑았다. 탁구 종목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그가 낙선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25km씩 걸어다니면서 선거 운동에 혼신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예상과 달리 23명 후보 중 2위에 올라 IOC 위원에 당선됐다. 이후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선수촌장을 지내고 2019년 조양호 전 회장 별세로 치러진 대한탁구협회장 보궐 선거에서도 이겼다. 작년 9월까지 재임했고, ‘체육계 변화’를 외치면서 이번 체육회장 선거에 도전했다.
선수 시절뿐 아니라 각종 선거에서 이변을 일으켜온 그답게 이번에도 그 진가를 보여줬다. 이번 체육회장 선거는 이기흥 현 회장 당선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선거인단 구성 자체도 이 회장에게 유리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추첨으로 뽑히는 인원 외에 전국 228개 시·군·구 체육회에서 추천한 인사가 선거인단에 포함되는 ‘지정 선거인 제도’가 도입됐는데, 현직 회장으로 지역 체육회와 접촉이 많았던 이 회장을 위한 제도라는 비판이 있었다. 또 ‘반(反)이기흥’을 외치고 나온 후보들마다 주장이 강해 단일화를 통해 양자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데도 실패했다. 4년 전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당시에도 이기흥 후보는 46.4% 득표율로 당선된 바 있다.
이 때문에 유 당선인이 지난해 9월 체육회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당선은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구(舊)세대를 상징하는 이 회장에 대한 반발이 이번 선거에서 나타났다. 선거 과정을 지켜본 체육계 인사는 “이번에 상대적으로 젊은 선거인단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이 회장 비위 혐의에 염증을 냈고 변화를 바라는 열망을 투표로 풀어낸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실제 이날 투표 현장에선 유 후보가 당선되자 환호성을 지르는 젊은 체육인들이 대거 눈에 띄었다. 대한체육회 전직 임원은 “젊은 체육인들이 변화를 원했다. 체육인들을 만나보면 한국 체육계가 나이 드신 분들이 권위를 내세워 끌고 간다는 비판이 많았다. 젊은 사람이 와서 변화를 이끌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많았다”고 전했다.
IOC 선수위원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발군의 지구력도 위력을 보였다. 체육회 관계자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전국 각 시도 체육회 인사들을 다 만나고 다니더라”면서 “밤잠을 줄여가면서 하루에 수백 ㎞를 차로 순회한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유 당선인 캠프 관계자는 “IOC 위원 선거 때도 그랬듯 발로 뛰는 선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정말 부지런하게 표밭을 훑고 다니며 선거 운동을 했고, 진심으로 다가섰던 게 유효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유남규·현정화·김택수 등 탁구계 선배들을 비롯, 선수 시절 교류했던 수많은 동료들이 유 당선인을 위해 노력한 점도 효과를 봤다. 한 체육 단체 인사는 “유 당선인이 과거 국제스포츠전략위원회 위원장을 하면서 교류한 젊은 체육인들이 이번에 큰 힘이 됐다고 하더라”고 했다.
반면 2016년 선거에서 처음 체육회장에 선출돼 한 차례 연임한 이 회장은 사법 리스크와 정치권 불출마 압박에도 무리하게 3선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이 회장이 비위 혐의에 대해 명쾌한 해명이나 사과 없이 강하게 반발만 하며 정부와 갈등을 키운 게 체육인들로부터 외면받았다는 지적이다. 한 체육계 인사는 “이 후보 주변은 조직력이 와해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 협회장은 이 후보 주위에 몸 바쳐 뛰어줄 사람이 없다는 말도 하더라”고 말했다. “‘이기흥이 변했다’고 한 체육인들이 적지 않았다. 전엔 정부와 맞서서 체육계 이익을 지키는 저항군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체육회장 자리를 위해 무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말도 나왔다.
이번 선거 과정에선 법적 공방도 있었다. 이 회장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직무 정지 조치를 내린 데 반발해 가처분 신청을 냈다가 기각됐다. 행정소송도 진행 중이지만 이 같은 행보가 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줬을 것이란 시선이다. 이 회장이 당선되더라도 문체부는 그의 비위 혐의를 이유로 취임 승인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밝힌 것도 이 회장에겐 불리한 요소였다.
이제 이 회장이 낙선하면서 체육회와 문체부 갈등도 수그러들 전망이다. 유 당선인으로선 정부와 관계를 회복해 이 회장 시절 1000억원 가까이 삭감됐던 체육회 예산을 회복하고, 내부 갈등을 빚었던 체육회 조직을 정상화하는 게 우선 과제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