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가 예상을 뒤엎고 유승민(43) 전 대한탁구협회장 당선으로 끝난 건 사실 ‘이유 있는 이변’이란 후문이다. 체육계는 물론, 이기흥(70) 현 회장 연임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던 정부 내에서도 대부분 이 회장 3선을 점쳤다. 이 회장이 체육회 직원 부정 채용, 예산 횡령 등 각종 비리 혐의를 받아 직무가 정지되고 경찰 수사까지 받고 있는데도 출마를 강행하자 “역시 8년을 회장으로 있으면서 다져놓은 기반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란 분석이 주를 이뤘다. 여기에 이기흥 후보에 대항하면서 나온 야(野)권 후보만 5명. 단일화한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데 사분오열한 상태로 이 후보를 이길 수 있겠냐는 전망이 많았다.

유승민 대한체육회장 당선인은 선거 운동 기간 체육회 산하 68개 종목 단체를 돌면서 각 종목을 직접 체험했다. 왼쪽은 유 당선인이 루지 썰매를 타기 위해 자세를 잡는 장면, 오른쪽은 역도복을 입고 바벨을 들어올리는 모습이다. /유승민 선거 캠프

작년 연말 만난 한 체육회 간부는 “유 후보 돌풍이 심상치 않다.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체육계 관계자들은 이런 전언을 듣자 “대세론을 이기긴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난 셈이다. 유 당선인 지지자들은 “콘크리트를 뚫었다”면서 기뻐했다. 체육회 내 이 회장 반대파들조차 “이 회장이 낙선할 가능성은 1%도 안 될 것이라 봤는데 정말 뜻밖”이라고 말했다.

그 여정은 우보천리(牛步千里)에 가까웠다. 유 후보는 장기인 지구력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전국 180개 이상 시·군·구 체육회를 방문했고, ‘쫄쫄이’ 역도복을 입고 역기를 들고 루지 썰매 체험을 하면서 밀착 소통을 마다치 않았다. 체육회 산하 68개 종목을 모두 해보면서 종목 간 심적 거리를 좁히려 애썼다. 선배 선거인을 만나면 세배를 했고, 후배 선거인에게도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선거인단 2244명 모두를 대상으로 이름을 부르고 선거에 꼭 참여해달라는 영상을 찍어 개별적으로 보냈다. 유 당선인 측 관계자는 “2016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선수 위원 선거 때는 60만 보를 걸어 다녔는데, 이번엔 아마 6만km 넘게 돌아다녔을 것”이라며 “진정성이 통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주로 시·도 체육회장들을 만나면서 ‘고공(高空) 캠페인’을 펼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선거인단에 젊은, 이른바 MZ(밀레니얼Z)세대가 대거 포함된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번 선거인단은 역대 최다 인원인 2244명이었다. 이 중 40대 이하가 전체 절반이 넘는 51.2%였다. 전체 투표율이 53.8%였는데, 40대 이하 젊은 층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출마했던 강신욱 단국대 명예교수는 “20~30대 참여율이 전보다 높아졌다”며 “40대 이하 연령층에서 유 당선인에게 집중적으로 표를 던진 것 같다”고 했다. 선거인단은 체육회 대의원과 각 종목 단체와 시도 체육회 임원과 선수·지도자·심판들 중 추첨으로 정하는데 이렇게 뽑힌 선거인단들이 전에는 위(시도체육회 고위 간부)에서 시키는 대로 표를 던지곤 했지만 더 이상 그런 압력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지적도 나왔다.

그래픽=백형선

유 당선인이 IOC 위원과 대한탁구협회장을 지내면서 쌓아 놓은 인맥도 도움이 됐다. 사격연맹 관계자는 “유 당선인이 IOC 위원 할 때 협회 행사에 영상 축사를 부탁했는데, 외국에 있다가 새벽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찍어서 보내주더라”라며 “코로나 사태 중 열린 도쿄 올림픽 때도 누구보다 열심히 현장을 다니며 선수들을 격려하더라”라고 전했다. 탁구계 선배인 현정화(56) 한국마사회 감독은 유승민 캠프 선거사무원으로 등록해 지지를 호소했다. 김택수(55) 미래에셋증권 총감독은 “유 회장은 직접 전국을 돌며 현장 목소리를 듣고 선거 공약을 만들었다”면서 “진정성을 가지고 다가갔기 때문에 선거인단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후보들이 비방과 네거티브를 앞세워 공격할 때도 유 후보는 맞불을 놓는 대신 현장 개간에 더 집중했다.

14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린 제42대 대한체육회장선거에서 당선된 유승민 후보(오른쪽)가 김대년 선거위원장과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뉴스1

문화체육관광부가 이 회장이 당선되면 비리 혐의 결론이 날 때까지 취임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한 체육 관련 기관 부서장은 “선거 때마다 혼란이 이어지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것에 대해 체육계 전반적으로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고 반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이번 선거에 반영됐다”고 했다.

선거 공학적으론 강태선 서울시체육회장이 출마한 게 이 회장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강 후보가 시도체육회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울시체육회 선거인단 표를 가져가면서 이 회장에게 돌아갈 표가 줄었다는 것이다. 유 당선인은 417표, 이 후보는 379표, 강 후보는 216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