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 200억원을 연세대에 기부한 현영숙씨가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언더우드관 앞에서 웃고 있다./김지호 기자

“재산을 죽을 때까지 붙들고 있으면 뭘 하겠어요. 다 나누고 가야지요.”

20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언더우드관에서 본지와 만난 현영숙(85)씨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현씨는 이날 남편 고(故) 이재운(1935~2021) 변호사와 함께 모은 전 재산 200억원가량을 연세대에 기부했다. 남편 이씨는 생전 이공계 학생 장학 사업에 전력한 사회사업가였다. 이북 실향민인 이씨는 검사 출신 변호사였지만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공업을 진행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이공학도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현씨는 4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고 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너무 많다. 나라가 일류가 되려면 고시생이 아니라 공학도(工學徒)가 많아야 한다” “부강한 선진국의 공통점은 과학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고인이었다.

남편 이씨는 1935년 황해도 연백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했다. “부모님과 함께 온 가족이 피란을 위해 연백군 해성면 앞바다에 나왔지만 피난민 수천 명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2대 독자인 나만 겨우 피란선에 올라 서울로 오게 됐는데, 이리도 오랜 이별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2008년 한 방송에서 고인은 6·25 당시 이산의 슬픔을 이렇게 회상했다.

16세 소년은 중학교 중퇴 후 신문 배달, 구두닦이를 하며 독학으로 1958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대구·제주지검 차장검사 등을 역임하며 10여 년 동안 검사 생활을 했다. 1972년 변호사 개업을 했고, 1975년 한국노동법률상담소장에 취임해 가난한 노동자들을 보살폈다. 1982년 이산가족 지원 단체인 ‘이산가족 재회 추진위원회’(현 일천만 이산가족 위원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고 2001~2007년 위원장을 지냈다.

이 시기 그는 이산가족의 대부(代父)로 불렸다. 1985년 9월에는 당시 72세였던 부친(이병규)을 만나기도 했다. 부친은 1992년 별세했다. 이후 고인은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 ‘공학 선진국’이라는 목표로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법인 이재운장학회를 만들어 이공대 입학생 학비를 지원했다. 2021년 고인 별세 당시 김영관 전 일천만 이산가족 위원회 사무총장은 “공학도를 지망하는 학생을 도우라는 게 고인의 뜻”이라고 했다.

고인의 집념은 아내 현씨의 이번 연세대 기부로 빛을 보게 됐다. 현씨에게 ‘왜 연세대에 기부했느냐’는 질문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 설립자를 언급했다. “쓰러져 가는 조선에 오신 선교사가 세운 학교니까요.”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몸담았던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료 기관이 제중원(세브란스 병원 전신)이었다.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물리·화학 등 의예과 과목을 가르쳤다.

기독교 학교인 연세대에서 김형석(104·평북 운산) 교수, 김동길(1928~2022·평남 맹산) 교수 등 실향민 출신 교육자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점도 부부에게 각별히 다가왔다고 한다. 현씨는 “국가 지원금이나 기업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했다.

현씨는 이날 기부 협약식에서 남편을 떠올리며 잠시 회한에 젖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남편은 1992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2010년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다. 이후 11년 동안 곁에서 극진한 간호를 한 사람이 아내 현씨였다. “남편이 쓰러지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씨는 별세 6년 전인 2015년, 통일나눔펀드에 3000만원을 기부했다. 당시에도 남편을 대신해 현씨가 찾아왔다. 현씨는 당시 본지 인터뷰에서 “매일 아침 남편의 상체를 조금 일으켜 조선일보 기사를 한 장씩 넘겨주며 함께 읽는데, 남편이 유독 통일나눔펀드 관련 기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며 “최근 신문을 보다가 ‘우리도 기부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남편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현씨는 이재운장학회 상근이사직으로 장학 사업에 매진했고, 이제 다다른 목표가 ‘연세대 전 재산 기부’라고 했다.

현씨는 “남편의 꿈처럼 학생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공부와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특히 이번 기부로 연세대에서 또 한 명의 이공계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길 바란다”고 했다. 연세대는 이번 기부금으로 고인의 이름을 딴 ‘이재운 의생명공학 융합 연구 센터’를 건립한다는 계획이다. 센터가 세워지면 생명과학과 공학, 의학 및 난치병 치료 등에 특화된 학문 간 융합 연구를 진행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