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경찰 51명이 다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서부지법 난동 사태 당시 경찰 저지선은 난동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지난해 11월 민주노총 폭력 집회 이후 경찰 내부에 ‘시위 온건 대응 기조’가 확산됐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20일 제기됐다. 당시 경찰 105명이 부상(중상 3명)당했음에도 민노총은 “헬멧과 방패를 착용하고 폭력·강압을 썼다”고 했다.

이날 복수의 현직 경찰은 “이후 ‘시위대에게 위압감을 주지 말라’는 내부 기류가 있었고, 헬멧·방호복 착용을 더욱 꺼리게 됐다”고 했다. 실제 19일 새벽 서부지법을 습격한 난동자들이 벽돌과 돌멩이, 날카로운 타일 조각을 던지며 각종 둔기를 휘두르는데도 경찰 기동대원들은 방호복과 헬멧조차 착용하지 않은 비무장 상태로 폭력에 노출됐다.

일러스트=박상훈

현직 경찰관만 글을 올릴 수 있는 한 소셜미디어에도 비슷한 증언이 올라왔다. 기동대원 A씨는 “경찰 생활을 하며 이런 처참한 현장은 처음이었다”며 “누워 있어도 눈물이 나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왜 지휘부는 직원들을 ‘몸빵’으로만 생각하나”라며 “방관한 현장 지휘부는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A씨는 “지휘부는 현장 경찰관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역시 현장에 있었던 B씨는 “난동자들이 법원 후문 쪽에 쇠 파이프, 막대기 등을 들고 배회하면서 계속 위협적으로 펜스를 쳤다”며 “이어 “누가 봐도 후문 쪽은 너무 허술해 보였는데 대비를 거의 안 시켰다”고 했다.

◇‘尹 퇴진’ 폭력 집회 막았다가 뭇매… 경찰, 이후 ‘온건 대응 모드’

19일 오전, 일반 천 모자와 장갑 등만 착용한 경찰이 방패까지 빼앗긴 채 난동자들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자 경찰은 오전 3시 32분쯤 방호복·헬멧을 착용한 기동대 등 1400명을 투입해 난동을 제압했다. 일선 경찰들은 “삼단봉이나 캡사이신 등을 준비만 해갔어도 난동자들이 이렇게 쉽게 법원을 습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9일 민주노총과 윤석열정권퇴진운동본부 등이 주최한 정권 퇴진 집회에서 군중 4만명과 경찰이 충돌, 경찰관 105명이 다쳤다. 3명은 골절상, 인대 파열 등 중상이었다. 박근혜 정부 시기였던 2015년 11월 민노총 등이 주도한 ‘민중 총궐기’ 때 경찰 129명이 다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충돌이었다.

그래픽=이철원

경찰은 이 같은 폭력 집회 배후에서 민노총 지도부가 조직적으로 지휘했다고 판단했다. 사전 허가된 집회 구역인 세종대로 5차로를 일부러 벗어나 7차로까지 점거했고, 경찰 저지선을 완력으로 무너뜨려 폴리스라인 50개를 부수기도 했다. 하지만 민노총과 야권은 오히려 경찰이 과잉 진압을 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해 11월 11일 당 공개 회의에서 “엄청난 수의 경찰이 중무장했다”며 “이제 거리의 국민이 경찰에게 구타당해 피 흘리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2개월여 후인 지난 19일, 이 대표 언급과는 정반대로 ‘경찰이 난동자에게 구타당해 피 흘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당시 조지호 경찰청장은 “집회·시위법 절차를 모두 준수했다”며 “시위대가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민주당 등 5개 야당은 경찰청을 항의 방문해 공식 사과까지 요구했다. 법원은 검찰이 청구한 시위 참가자 4명에 대한 구속 영장을 모두 기각하기까지 했다.

이후 12·3 비상 계엄 사태를 지나면서 각종 미신고 불법 집회가 이어지는데도 경찰은 손을 쓰지 못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지난달 21일 트랙터 35대와 화물차 60여 대를 끌고 한남동 윤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에 참석하려다 서초구 남태령 인근에서 경찰과 약 28시간 대치하다가 트랙터로 경찰 버스를 들어 올리려 하는 등 충돌을 빚었다. 하지만 이날도 야당 의원들이 현장에 와 경찰 지도부와 면담했고 결국 서울 도심 진입을 허용했다.

한남동 일대 대규모 친윤·반윤 집회에선 도로 불법 점거와 철야 집회가 아예 일상이 됐다. 지난 4일엔 민주노총이 한남동 관저 방향으로 행진하다가 애초에 신고한 범위를 넘어 한남대로 양방향 전 차로(10차로)를 불법 점거해 도로가 전면 통제됐다.

지난 18~19일 서부지법 일대도 현행법이 규정한 집회 금지 지역인 법원 앞 100m 이내여서 시위 자체가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마포대로 10차로가 전면 통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경찰들은 “시위대가 도로 점거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관공서 담을 넘거나 경찰을 밀거나 심지어 때리고 부수는 것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20일에도 서울 곳곳에 친윤 시위대가 집결했다. 이날 오후 1시쯤 서부지법 정문 앞에는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 10여 명이 모였다. 비슷한 시각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도 친윤 시위대 40여 명이 모였다. 헌재 앞도 법원과 마찬가지로 100m 이내 시위가 불법이다.

하지만 이들은 ‘1인 시위’라고 주장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구속 무효” “빨갱이 법원” 같은 구호를 외쳤다. 당초 윤 대통령 방어권 보장과 관련한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던 종로구 국가인권위 사무실 앞에도 친윤 시위대 50여 명이 몰려왔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엔 “헌법재판소에 불을 지르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와 관련, 헌재 측은 “헌법재판관에 대한 신변 보호는 이미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서울의 한 일선서 경정은 “법원 바로 앞 등 집회 금지 장소에서도 집회의 자유를 예외적으로 허용해온 결과물이 서부지법 난동 사태”라고 했다. 또 다른 파출소 팀장은 “그간 경찰이 과격 시위에 제대로 된 공권력을 행사한 적이 거의 없다”며 “법 집행을 더 강력하게 하고, 공권력과 원칙을 바로 세워야 제2, 제3의 서부지법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