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올 하반기 미국, 일본 등에서 활용 중인 ‘용적 이양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고도(높이) 제한 등 규제 때문에 다 못 쓴 용적률을 사고팔 수 있게 허용하는 제도다. 국내에서 용적 이양제가 시행되는 건 처음이다. 서울시는 “올 상반기 관련 조례를 제정해 하반기부터 시행할 것”이라고 23일 밝혔다. 서울시가 조례를 제정하면 용적 이양제를 시행할 수 있다. 송파구 풍납토성 주변이나 강서구 김포공항 주변 등 각종 규제로 재산권 침해가 큰 지역이 시행 후보지로 꼽힌다.
용적 이양제는 고도 제한 등 규제 때문에 법이 정한 용적률만큼 건물을 높이 올리지 못하는 경우 못 쓴 용적률을 다른 재개발·재건축 단지에 팔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법정 용적률이 1000%인 A 단지가 근처 문화재 때문에 높이 제한에 걸려 용적률을 400%밖에 쓰지 못한다면, 나머지 600%를 고도 제한 구역 밖에 있는 B 재개발·재건축 단지에 팔 수 있게 된다. A 단지는 규제로 인한 손해를 덜 수 있고 B 단지는 용적률을 추가로 확보해 사업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 서울시 입장에서는 도심을 고밀도로 개발해 토지의 효율을 더 높일 수 있다.
용적률은 대지 면적 대비 건물의 연면적(각 층의 면적을 모두 합친 것)을 말한다. 주거지역, 상업지역 등 대지의 용도지역에 따라 정해지는데, 용적률이 높을수록 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경복궁, 덕수궁, 선릉 등 문화재 주변 반경 100m 지역은 건물을 높게 지을 수 없는 ‘앙각 규제’를 받고 있다. 풍납토성 인근 지역은 땅을 깊게 팔 수 없어 고층 건물 신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포공항 주변에는 항공기 운항을 위한 높이 규제가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러한 규제 지역이 총 152만㎡에 달한다. 여의도의 절반 정도 크기다.
서울시 관계자는 “문화재나 공항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용적률만큼 건물을 올릴 수 없어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며 “못 쓴 용적률이라도 팔 수 있게 허용해 재산권 침해를 완화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 뉴욕이나 일본 도쿄 등에선 이미 용적 이양제를 활용하고 있다. 뉴욕의 랜드마크인 ‘원 밴더빌트’는 근처 그랜드센트럴터미널의 용적률을 넘겨받아 93층 높이(용적률 약 3000%)로 지었다. 도쿄역 근처의 신마루노우치 빌딩(38층), 그랑도쿄(43층) 등 6개 빌딩도 도쿄역이 사용하지 않은 용적률 700%를 사들여 고층으로 올린 사례다. 도쿄역은 용적률을 판 돈으로 역사의 옛 모습을 복원했다. 해외에선 문화재를 보존하는 동시에 도심을 고밀도로 개발할 수 있는 방법으로 통한다. 오세훈 시장은 2023년 도쿄와 뉴욕을 잇따라 방문해 용적 이양제 도입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었다.
우리나라에선 생소한 제도라 선도 사업지를 우선 지정해 시범 운영부터 한다는 계획이다. 업계에선 풍납토성,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경복궁 인근 등이 선도 사업지로 거론된다.
서울시는 제도 시행 후 새로 짓는 건물뿐 아니라 기존 건물도 남은 용적률을 팔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이 돈으로 건물 리모델링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용적률을 팔 수 있는 지역의 범위, 용적률을 최대 몇 %까지 살 수 있는지 등도 검토해야 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용적률을 파는 곳과 가까운 단지를 중심으로 제도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서울 사대문 안의 용적률을 강남 재개발 사업지에 팔 수는 없게 하겠다는 뜻이다. 용적률 거래는 용도 지역별로 정한 용적률의 법정 상한까지만 허용하기로 가닥이 잡혔다. 서울시는 오는 25일 ‘서울형 용적 이양제’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어 이 같은 방안을 논의한다.
전문가들은 용적 이양제를 도입하면 각종 규제 탓에 지지부진한 서울 도심 재개발이 속도를 낼 것으로 본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뉴욕이나 도쿄처럼 고밀도 복합 개발이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일부 지역에서는 고밀 개발로 땅값이 뛸 가능성이 있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용적률의 가치를 두고 매도자와 매수자 간 입장 차가 클 가능성이 높아 일반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용적률
대지 면적 대비 건물의 연면적(각 층의 면적을 모두 합친 것)을 말한다. 주거지역, 상업지역 등 땅의 용도지역에 따라 정해지는데 용적률이 높을수록 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다. 건물의 연면적을 대지 면적으로 나눈 뒤 100을 곱해 계산한다. 예를 들어 100㎡ 땅에 층당 면적이 50㎡인 건물을 4층까지 올리면 용적률은 200%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