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성규

직장인 김모(28)씨는 최근 서울 용산 블루스퀘어홀에서 상영하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VIP석에서 관람하는 내내 황당한 기분이었다. 17만원에 예매한 최고 등급 좌석 위치가 2층 4열 구석이었다. 직전 공연 ‘킹키부츠’ 땐 한 단계 낮은 R등급으로 판매했던 곳이다. 김씨는 “오페라 글라스(관람용 안경)를 써도 배우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데 무슨 VIP석이라는 건지 황당하다”고 했다.

만인(萬人)의 VIP화(化). 공연 업계에서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블루스퀘어홀의 VIP석 비율은 48%.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은 1층 전체가 최고 등급 (R·56%)이다.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55%), 송파 샤롯데씨어터(43%) 등 주요 공연장 모두 마찬가지다. 관람객들은 “VIP석이라며 20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을 받으면서 정작 VIP 대접은 못 받는다”며 한숨을 쉰다.

그래픽=김성규

백화점·카드 업계에서 VIP 인플레이션은 ‘기본 전략’으로 통한다. 지난해 갤러리아·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의 VIP 매출 비중은 40~50%를 기록했다. 백화점들은 VIP 회원 규모 등을 ‘영업 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는다. 한 업계 관계자는 “VIP가 되는 기준은 높이지 않고, VIP 등급을 세분화하는 방식을 쓴다”고 했다. 실제 신세계백화점 VIP는 연 500만원 이상을 쓰면 될 수 있지만 등급은 트리니티·블랙다이아몬드·다이아몬드·플래티넘·골드·에메랄드·레드 7단계로 세분화돼 있다. 갤러리아는 7등급, 현대백화점은 6등급, 롯데백화점은 5등급으로 VIP를 나눈다.

4대 금융지주 계열사 카드사에서도 이용 실적 등을 바탕으로 ‘VIP 고객’ ‘우수 고객’이라 이름 붙이고 무이자 할부 혜택 등을 제공하지만, 일반 회원들이 받는 혜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예계·패션계·게임업계에서 VIP는 사실상 ‘일반 등급’과 동의어다. VVIP, VVVIP는 예사고 심지어 VVVVIP 등급까지 등장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가 특별 대접을 받는다는 착각을 주는 상술”이라고 했다.

스포츠계도 마찬가지다. 오는 22일 프로야구 시즌 개막을 앞두고 KBO 구단 10곳에서 유료 시즌권·멤버십 판매를 한다. 일정 금액을 받고 VIP 고객들에게 ‘선(先)예매’권을 주는데, 구단 중 5곳은 일부 고객에게 그보다 비싼 금액을 받고 ‘선선예매권’을 부여했다. 팬들은 “다음은 선선선, 선선선선예매권이냐”고 반발했다. 여행업계에서도 ‘1일 1미슐랭’ ‘전 일정 5성급 호텔’ ‘시크릿 파티’ 등 ‘특별한 일정’으로 판매하는 여행사 ‘VIP’ ‘하이엔드’ 상품이 전체의 25%가량이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VIP’가 되고 싶다는 욕망(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은 전 국민의 40% 가까이가 ‘특별한 지역’에 거주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지난달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5119만명 중 1898만명(37%)이 특별시, 특별자치시·도, 특례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는 1946년 미 군정에 의해 ‘특별시’로 지정됐다. 미국 수도 워싱턴의 행정구역명 ‘컬럼비아구(District of Columbia·D.C.)‘의 디스트릭트는 ‘특정 성격의 구역’이라는 의미지만, 일본이 이 지명을 ‘コロンビア特別區‘로 번역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제주도가 관광·문화적 특수성을 고려해 승격됐고 2012년 세종시가 특별자치시가 됐다. 2023년엔 강원도가 북한과 접경지라는 이유로, 지난해엔 전라북도가 농업 중심 경제를 특화한다는 명목으로 특별자치도가 됐다. 2022년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인구 100만명 이상 기초자치단체는 일괄적으로 특례시가 됐다. 수원·용인·고양·창원·화성이 모두 특례시가 됐다. 현재 추진 중인 대구경북특별시(488만명), 경기북부특별자치도(360만명)까지 출범하면 전 국민의 절반 이상(53%가량)이 ‘특별 거주민’이 된다.

강형기 전 한국지방자치학회장은 “재정·행정적 권한 강화는 미미한 수준인데도 내가 사는 지역을 특별한 곳으로 만들겠다는 허영심 추종 풍조에 전 국토가 특별해지는 판국”이라고 했다. 김상돈 한국공공사회학회 대표는 “사장님·회장님·대표님·여사님·사모님 등 사적 ‘호칭 인플레이션’이 시장(市場)을 넘어 공공 영역까지 확장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