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청와대 습격 사건’의 북한 무장 공비 출신 고(故) 김신조 목사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영등포구 장례식장에 우성제(77)씨가 나타났다. 우씨는 고인을 포함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 소속 공작원 31명의 침투 사실을 경찰에 처음 신고한 ‘나무꾼 4형제’ 중 막내다.
이들의 인연은 5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1월 19일 눈으로 덮인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법원리 삼봉산 기슭에서 나무꾼 우씨 4형제는 북한 공작원 무리와 마주쳤다. 우씨 나이 20살 때였다.
김씨와 우씨는 2014년 한 방송에 함께 출연해 당시를 회상했다. 김씨는 “우리를 본 나무꾼들이 지게와 나무를 다 버리고 가더라. 이건 분명히 신고하러 가는 것이었다”고 했다.
급하게 나무꾼들을 붙잡아온 북한 공작원들 사이에서 투표가 벌어졌다. 자신들을 발견한 민간인들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청와대로 가는 길에 만나는 누구든 무조건 죽이고 땅에 파묻어서 흔적을 없애라’는 것이 임무였다고 한다.
김씨는 “죽이는 건 간단한데, 땅이 얼어서 팔 수가 없었다”며 “심지어 4명을 묻을 땅을 파야 하는데 땅을 파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투표 결과는 ‘살리자’는 쪽이 절대다수였다고 한다.
다만, 나무꾼들이 신고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김씨는 “사람들은 물질에 약하지 않나. 당시 북한에서도 귀하던 시계를 풀어주고, 통일되면 지역 군수를 시켜주겠다는 제안도 했다”며 “그야말로 무장공비식 포섭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씨가 기억하는 당시 상황은 조금 다르다. 우씨는 “누가 봐도 간첩인 사람들이 엿도 주고, 오징어도 주는데 죽을 상황에 먹히기나 했겠느냐”며 “신고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라는 말에 그제야 ‘살길이 있는가 보다’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서약서를 쓰자 북한 공작원은 자신들 때문에 일을 못했으니 팔아서 쓰라며 시계를 건넸다고 한다. 우씨는 그러나 “그 시계, 나중에 보니 팔아도 돈도 안 되는 시계였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렇게 나무꾼들을 풀어주고 김씨 일행은 계속 서울을 향해 나아갔다. 이틀 뒤 북한산 비봉에 도달하자 아침부터 헬리콥터가 떠다니고, 도로는 통제되어 있었다. 김씨는 “그때 나무꾼들이 신고했다는 걸 딱 느꼈다”고 했다. 실제로 우씨 형제들은 ‘신고하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협박에도 풀려난 그 길로 파출소에 들러 신고했다.
◇”계속 만나보니 우리 형님 같더라고”
김씨와 우씨는 절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은 사이지만, 최근까지 여러 차례 왕래하며 인연을 이어왔다. 우씨는 “나중에 여러 단체에서 하는 ‘김신조 루트’ 따라가기 행사 등에서 자주 만나게 됐다”며 “만나다 보니 친숙해지고, 저보다 연배도 많으시니 우리 형님 같고. 그러다가 계속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우씨는 김씨가 1997년 서울성락교회 목사 안수를 받던 자리에도 참석해 누구보다 아낌없는 축하를 보냈다고 한다.
김씨는 “처음에는 약속을 안 지키고 신고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무꾼 형제들이 괘씸했다”고 했다. 하지만 “우씨 형제가 없었다면 작전 실패도 없고, 대한민국이 공산화됐을 수 있다”며 “비록 가난한 나무꾼이지만 얼마나 애국자냐”고 추켜세웠다. 김씨는 생전 여러 차례 “우씨 형제가 대한민국을 살렸다”고 했다.
그렇게 50년 넘게 우정을 이어온 김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우씨는 장례식장을 찾았다. 우씨는 조문 후 김씨 아내의 손을 맞잡고 한동안 놓지 못했다.
그는 “지난해 여름 치매를 앓고 계신 중에도 동생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건강하게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고 슬프다. 좋은 곳에서 영면하시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