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온 박수근의 연하장 안쪽에 그려진 판화. 연 날리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어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화가 박수근(1914~1965)이 지인에게 보낸 연하장이 6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박수근이 1962년 12월 미국인 로버트 마티엘리 부부에게 보냈던 연하장과 봉투, 개인전 리플릿 등 3점을 강원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에 기증했다고 지난 20일 밝혔어요. 연하장 안쪽에 있는 박수근의 판화는 연을 날리는 사람을 묘사했어요. 박수근은 이중섭·김환기 등과 함께 현대 한국을 대표한다고 할 만한 화가이며,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저는 다만 이웃들의 모습을 그릴 뿐입니다

“당신의 그림에는 여성들의 모습이 참 많군요.”

1950년대 어느 날이었어요. 전시회에서 박수근의 그림을 관람하던 한 외국인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빨래하는 여성, 장터에서 물건 파는 여성, 아기 업은 소녀, 나물 캐는 소녀… 이렇게 여인들을 즐겨 그리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박수근은 이렇게 더듬더듬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성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저는 다만 이웃들의 모습을 그릴 뿐입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들이야말로 이 땅의 가장 소중한 존재죠.”

박수근 작품 ‘빨래터’(1959). 캔버스에 유채. 박수근은 ‘빨래터’라는 제목의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한 작품은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되기도 했어요. /박수근연구소

박수근의 화폭에 그려진 모습은 대부분 6·25 전쟁이 끝난 뒤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의 삶이었습니다. 어린 동생을 업은 채 엄마를 기다리는 소녀, 시장 사람들, 머리에 짐을 이고 가는 아주머니들, 빨래터의 아낙네들처럼 소박하고 정겨운 이웃의 삶이 거친 나무껍질이나 바위 같은 느낌으로 화폭에 묘사됐던 것이죠.

박수근의 고향은 강원도 양구였어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일곱 살 때 광산업에 손을 댔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해 가세가 급속히 기울었습니다. 양구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간 뒤 미술에 소질을 보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합니다. 18세가 되던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했지만 연이어 세 번 낙선했고, 21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1936년 수채화 ‘일하는 여인’으로 선전에서 다시 입선했죠. 열악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그림을 그렸던 겁니다.

소박한 인물과 굵은 윤곽선… ‘한국적인 정취’

강원도 김화 출신으로 1940년 박수근과 결혼한 아내 김복순은 몇 시간씩 남편의 그림 모델이 돼 줬습니다. 평남도청 서기로 취직해 평양으로 이사한 박수근은 그곳 화가들과 어울리며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38선 이북인 김화의 금성중 미술교사가 됐지만, 공산 치하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피란 통에 가족과 헤어졌다가 갖은 고생 끝에 재회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어요. 하지만 전쟁 중이라 생계가 막막했죠. 미군 PX(군부대 내 매점)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도 했어요.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박수근의 작품 ‘봄이 오다’(1932). 종이에 수채. /박수근연구소

휴전이 된 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하면서 박수근은 미술계에서 화가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박수근 특유의 소박한 인물, 굵고 검은 윤곽선, 황갈색 색채, 화강암처럼 보이는 두꺼운 질감 같은 화풍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됐어요. 그의 그림에서 한국적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외국인 애호가들도 하나둘 나타나게 됐습니다. 미국 뉴욕의 한국현대회화전에 ‘모자’ ‘노상’ ‘풍경’이 전시되고 샌프란시스코의 동서미술전에 ‘노변의 행상’이 출품됐어요.

1959년 국전의 추천 작가, 1962년 국전의 심사위원이 됐고 주한 미 공군사령부가 주선한 ‘박수근 특별 초대전’이 열리는 등 박수근은 짧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그림 기법도 완숙해졌고 ‘동양적인 유화’라고 불릴 정도로 국내외에서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신장과 간이 나빠졌고 백내장으로 인해 한쪽 눈이 실명하는 등 병마와 싸우는 동안 좀처럼 생활고를 벗어날 수는 없었어요.

헐벗은 나무에게서 다가올 희망을 보다

이 무렵 박수근은 사시사철 고집스럽게 헐벗은 겨울 나무를 그렸습니다.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시절이 언제나 추운 겨울 같기도 했을 테죠. 또한 그런 고통은 전쟁을 겪고 난 한국인 모두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헐벗은 나무들은 초라하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굳세고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머지않아 새싹을 틔우고 녹음을 드리울 것이라는 희망이 거기에 서려 있는 것이죠. 박수근을 미군 PX 시절부터 알고 지낸 작가 박완서(1931~2011)는 1970년 그를 모델로 한 화가가 등장하는 소설 ‘나목(裸木·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을 썼습니다.

박수근은 시력이 더욱 악화되는 상황에서 짙은 안경을 쓰고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1964년의 ‘할아버지와 손자’가 마지막 국전 작품입니다. 이 무렵 모처럼 밝은 봄의 분위기를 표현한 ‘강변’도 그렸죠. 1965년 봄, 박수근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습니다.

박수근이 죽은 뒤 그의 작품 가격은 급속히 치솟았습니다. 작품 ‘빨래터’는 2007년 국내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돼 사람들을 놀라게 했죠. 박수근의 작품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그림’이라 할 만한데요. 다른 사람들이 해외의 화려한 요소들에 눈을 돌릴 때 박수근은 그림 속에서 우직하게 한국적인 것들을 지켰고, 가난한 이웃과 헐벗은 산하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가올 희망에 대해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책을 소중하게 들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담은 ‘독서’(1950년대). 앞으로 찾아올 희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하드보드에 유채. /박수근연구소

개인적으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박수근 그림은 ‘독서’인데요. 장녀 박인숙을 모델로 했다는 이 그림 속 단발머리 소녀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그 당시만 해도 무척 귀했던 책을 무척 소중한 자세로 손에 든 채 내일에 대한 희망을 오롯이 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