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문지영이 지난 1일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개막 연주회에서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고 있어요. /예술의전당

올해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의 탄생 150주년입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기념 음반을 발표하고,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동료 연주자들과 결성한 악단인 ‘고잉홈 프로젝트’나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등은 공연도 열고 있지요.

라벨은 같은 선율이 무한 반복되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볼레로’나 앙코르로 사랑받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같은 곡들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들 외에도 라벨의 음악적 매력이나 공로는 적지 않지요. 그동안 라벨에 대해 잘 몰랐던 다섯 가지를 소개합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올해 라벨 탄생 150주년을 맞아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과 독주곡들을 담은 음반들을 냈어요. /유니버설뮤직

①스위스적 정교함, 스페인적 열정

라벨은 스위스 출신의 발명가이자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와 스페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스페인 접경 지역인 프랑스 서남단의 시부르가 작곡가의 고향이지요. 아버지 피에르 조제프 라벨(1832~1908)은 내연 기관 발명에 공로가 컸던 초기 자동차 산업의 선구자 가운데 하나였지요.

라벨의 음악에는 스위스의 정밀성과 스페인의 열정이 공존한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실제로 동료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 시계 장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부산시향과 함께 라벨 관현악 전곡을 연주했던 지휘자 최수열 연세대 교수는 “라벨은 연주자의 재량을 없앤다고 느낄 만큼 뉘앙스와 속도, 연주 방식 등에 대해 상세하고 치밀하게 적어 놓았던 작곡가”라며 “그의 악보만 보아도 엄격함과 정밀성을 느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반면 ‘스페인 광시곡’ 같은 관현악이나 오페라 ‘스페인의 한때(L’heure espagnole)’에서는 당장 제목부터 스페인적 향취가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그의 대표곡인 ‘볼레로’ 역시 스페인 춤곡입니다. 이처럼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열정의 공존이야말로 라벨 음악의 묘한 매력입니다.

②음악 영재가 작곡 콩쿠르는 낙선

라벨은 열네 살에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던 영재 출신입니다. 2년 뒤에는 피아노 부문 수석을 차지했지요.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인 ‘밤의 가스파르’는 “피아노 음악 역사상 손가락을 가장 꼬이게 만드는 작품 중 하나”(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로 불릴 만큼 까다로운 난곡(難曲)입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라벨은 트럭 운전병으로 참전했어요. 독일군의 폭격이 빗발치는 최전방에서 무기 수송 임무를 맡기도 했지요. /위키피디아

하지만 라벨은 정작 작곡 분야에서 인정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7세기부터 프랑스에서는 예술 분야 우승자를 선정하는 대회를 열었는데 이 대회를 ‘로마 대상(Prix de Rome)’이라고 불렀지요. 프랑스 대회인데도 ‘로마 대상’이라고 부른 것은 우승자에게 로마에서 체류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음악 분야에서는 베를리오즈(1830년), 샤를 구노(1839년), 비제(1857년), 드뷔시(1884년) 같은 쟁쟁한 작곡가들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반면 라벨은 5번이나 이 대회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 말았습니다. 특히 1905년 마지막 낙선 때는 예선 탈락하는 바람에 판정의 공정성을 놓고서 논란이 벌어졌지요. ‘라벨 사건(L’affaire Ravel)’으로 불렸던 이 사태로 파리 음악원장이 사퇴하는 등 프랑스 음악계도 한바탕 홍역을 앓았습니다. 라벨도 청년 시절에는 “이 불운이 저를 좌절케 한다”고 토로했지요.

③1차 대전 참전, 독일 음악 금지엔 ‘반대’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라벨은 프랑스 공군에 입대를 신청했습니다. 공군 조종사를 꿈꿨지만 나이와 심장 이상 등으로 보류 판정을 받자 결국 이듬해 포병 부대의 트럭 운전병으로 입대했지요. 그 뒤 독일군의 폭격이 빗발치는 최전방에서 무기 수송 임무를 맡기도 했습니다. 스트라빈스키도 “그의 나이와 명성을 감안하면 손쉬운 길을 걷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면서 라벨의 용기에 감탄했지요.

1차 대전 당시 프랑스에서는 독일 음악을 전면 금지하자는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라벨은 여기에 반대 의사를 밝혔지요. “프랑스 작곡가들이 외국 동료들의 작품을 전면적으로 무시하는 건 위험한 일”이며, “풍성한 우리 음악 예술이 곧 쇠퇴하고 뻔한 공식에 고립되고 말 것”이라는 소신 때문이었습니다.

④ ‘인상주의’로 불렸지만 좋아하지 않아

흔히 라벨과 드뷔시는 ‘인상주의(印象主義)’ 작곡가로 불립니다. 원래 인상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사조였지요. 모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실내가 아니라 야외에서 시시각각으로 빛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을 화폭에 담고자 했지요.

라벨(사진 가운데 앉은 이)의 음악에 매료된 미국 작곡가 조지 거슈윈(맨 오른쪽)은 라벨에게 작곡을 배우고 싶어 했지만, 라벨은 ‘일류(一流) 거슈윈이 될 수 있는데 굳이 이류(二流) 라벨이 될 필요는 없다’면서 완곡하게 사양했지요. /모리스 라벨 재단

프랑스 작곡가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같은 명칭이 붙었지만, 정작 드뷔시와 라벨은 이 말을 반기지 않았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드뷔시는 “몇몇 어리석은 자들에게, 특히 비평가들에게 오용되고 있는 용어”라며 반감을 드러냈지요. 라벨 역시 인상주의라는 말에 국한되지 않고 바로크 음악부터 재즈까지 다양한 조류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라벨은 1902년 선배 드뷔시의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초연을 보고 감동해서 당시 14회 전 공연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지요. 당시 프랑스 음악계 인사들도 양쪽의 지지자로 나뉘어 상호 비판을 하는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둘은 인상주의로 함께 묶이지만, 실제 음악에는 차이도 적지 않습니다. 프랑스 음악학자 롤랑 마뉘엘은 ‘음악의 기쁨’에서 “드뷔시가 서정의 마법사라면, 라벨은 감각의 마법사”라는 멋진 비유를 들기도 했지요.

⑤당대 최고의 관현악 귀재

라벨의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관현악 편곡의 귀재였다는 사실입니다. 일찍부터 피아노곡을 먼저 작곡한 다음에 오케스트라를 위해 직접 편곡하는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라벨의 작품은 피아노곡과 관현악곡이 모두 존재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관현악 대가(大家)’라는 라벨의 매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러시아 작곡가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입니다. 원곡은 피아노곡이지만, 라벨은 1922년 오케스트라를 위한 관현악으로 편곡했지요. 본래 편곡보다는 원곡을 높이 사는 것이 클래식 음악계의 풍토이지만, 이 곡만은 라벨의 관현악 편곡이 무소륵스키의 피아노 원곡보다 즐겨 연주될 만큼 ‘역전’된 것도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