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시 6·25 참전유공자 기념탑’은 춘천 출신 6·25 참전 유공자 3286명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12m 높이 탑이에요. /국가보훈부

국가보훈부가 지난 4일 강원도 춘천대첩평화기념공원에서 6·25 전쟁 참전·유공자 3286명을 기리는 기념탑 제막식을 열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춘천대첩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후 춘천 옥산포·소양강·봉의산 일대에서 군·경찰·학생 등이 뭉쳐 북한군의 기습 남침을 막아낸 전투입니다. 여기서 ‘대첩(大捷)’이란 ‘크게 이겼다’는 뜻인데, 당시 춘천 전투는 적군의 남침(북쪽이 남쪽을 침공함)을 지연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군은 끝내 후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대첩’이란 이름이 붙은 걸까요?

히틀러와 김일성의 ‘미스터리 3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과 6·25 전쟁(1950~1953)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가 초반 매우 중요한 시기에 머뭇거렸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선 애석하게도 일찍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던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연합군 33만여 명이 철수에 성공한 ‘됭케르크 작전’ 당시, 독일군은 5월 24일부터 3일 동안 진격을 멈춰 결과적으로 연합군이 영국으로 철수할 시간을 벌어 줬습니다. 1950년에는 기습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뒤 3일 동안 한강을 건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고, 그 결과 국군은 진영을 정비해 후퇴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북한의 김일성은 도대체 그 중요한 시점에 왜 그랬던 걸까요? 히틀러는 그 직전 아라스 전차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뒤 연합군의 전투 능력을 과대평가해 선두 기갑부대가 전멸할까 봐 겁을 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히틀러가 ‘할 수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김일성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봐야 합니다. 무슨 얘긴지 따져보겠습니다.

전쟁 첫날 두 차례나 후퇴한 북한 2군단

6·25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 김일성의 계획은 ‘최대한 빨리 남한 전체를 점령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유엔군이 참전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전략이었죠. 서부 전선에서 1군단이 신속하게 서울을 점령하고, 중부전선의 2군단은 38선 바로 남쪽에 있는 춘천을 점령한 뒤 남서쪽의 수원을 침공, 서울에서 내려온 국군의 측면을 공격해 포위 섬멸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1950년 6월 전쟁 발발 직후 강원도 춘천 지역 전투에서 북한군을 향해 돌진하는 국군의 모습. /육군

서부 전선에서 국군은 패전을 거듭했고 북한군은 6월 28일 서울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춘천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북한 2군단은 개전 당일인 6월 25일 장갑차 54대와 전차 30대, 포 523문 등 대규모 장비를 투입해 2만7000여 명의 병력으로 춘천을 공격했습니다. 이날 정오까지 춘천을 점령할 계획이었습니다. 병력 9000여 명, 장갑차나 전차 한 대도 없는 국군 6사단이 이를 막아야 했습니다.

38선 모진교를 넘어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25일 오전 10시 춘천 옥산포까지 침공했습니다. 인근 보리밭에서 대기하고 있던 국군 6사단 7연대가 일제히 사격을 가해 북한군은 퇴각했습니다. 6·25 전쟁 중 북한군의 첫 퇴각이었습니다. 오후 2시, 북한군은 자주포(自走砲·차량이나 장갑차에 고정해 만든 포) 10대를 앞세워 다시 옥산포를 공격했고, 국군 7연대 대전차포중대가 화염병을 던져 자주포 2대를 파괴하자 다시 퇴각했습니다. 북한으로선 전쟁 첫날의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 버렸던 것이죠.

북한군의 발목을 사흘 잡아놓은 전투

26일 오전 8시부터 다시 북한군이 옥산포로 집결했지만 국군 7연대 1대대가 막아냈습니다. 오후 1시 북한군이 자주포를 앞세워 다시 침공해 오자 격렬히 저항하던 국군은 2시에 후퇴했습니다. 김종오 6사단장은 적의 전면 공세를 예상하고 방어선을 소양강 남쪽으로 변경했습니다. 북한군으로선 춘천 점령은커녕 여전히 소양강도 건너지 못한 것이었죠.

27일 새벽 5시부터 북한군은 소양교를 건너기 위해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국군은 끈질기게 방어했고 오전 10시에는 북한군이 전 방향에서 총공세에 나섰습니다. 서부전선에선 이미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하기 직전인 상황에서, 육군본부는 중부전선이 너무 북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기 위해 6사단에 전략적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6사단은 춘천에서 빠져나와 홍천으로 철수했죠.

북한군이 춘천 시내에 진입한 것은 27일 오후 6시였습니다. 국군 6사단은 3일 가까운 시간 동안 춘천에서 적을 막아냈던 것입니다. 북한군이 홍천으로 침공해 오던 28일 국군 2연대와 19연대 3대대는 말고개에서 기습 육탄전으로 적의 자주포 10대를 노획하거나 파괴했습니다. 국군의 성공적인 지연전으로 인해 북한군은 30일 오후 6시가 돼서야 홍천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정보다 3일이 늦은 것이죠.

지연전이 전쟁 판도를 바꿨다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 서부 전선에서 총공세를 시작한 것은 가까스로 홍천에 발을 디딘 다음 날인 7월 1일이었습니다. 중부 전선의 북한군이 내려올 때까지 서울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국군은 한강 방어선 전투로 7월 3일까지 적군의 한강 도하를 막았습니다. 7월 7일, 유엔은 결의안 제84호를 통해 ‘미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한국에 군사적 지원을 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 같은 중부 전선의 상황은 북한의 침공 계획을 완전히 어그러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이 당시 2군단장과 2사단장·12사단장을 전격 교체했던 것에서 그들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훗날 김일성은 전쟁의 실패에 대해 ‘초기에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후퇴해 재정비할 시간을 줬던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춘천 전투가 그들에겐 아주 아픈 상처였던 것이죠.

1950년 6사단장에 임명된 김종오 장군(왼쪽 사진)은 전쟁 후인 1961년 육군참모총장에 오릅니다(오른쪽 사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이 때문에 ‘춘천 전투가 아니었더라면 인천상륙작전도 불가능했을 것’ ‘대한민국의 생존에 백선엽 못지않게 기여한 사람은 바로 6사단장 김종오’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북한군의 공세를 늦춘 지연전에 성공했기 때문에 춘천 전투는 전쟁 전체의 판도를 바꾸는 데 기여한 ‘전략적 승리’로 재평가받았고, ‘춘천 대첩’으로까지 불리게 된 것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해안에 상륙하는 미군의 모습. 춘천 전투는 북한군의 공세를 늦춰 반격의 기회를 만들었지요. /미 해군역사유산사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