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중국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 같은 인물이 없습니다.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비굴할 정도로 순종적이면서도 중국 외교가 이념 중시의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할 지도자가 보이지 않아요.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도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달라졌지만 저우언라이의 실용주의와 평화공존의 대원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국내 1세대 중국 연구자이자, 한·중 수교 이후 초창기 대중(對中) 외교를 직접 담당한 외교관으로서 이론과 현장 경험을 두루 갖춘 정종욱(80)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가 20년 넘는 학문적 열정과 집념을 바탕으로 ‘저우언라이 평전’을 냈다.

50년간 중국 정치외교를 연구한 국내 1세대 중국 연구자인 정종욱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론과 현장 경험을 두루 갖춘 '중국통'이다./조선일보DB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후 미국 예일대에서 중국 정치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 교수는 50여 년간 중국 정치·외교를 다방면에서 천착(穿鑿)해온 대표적인 ‘중국통(通)’이다.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과 제3대 주중(駐中) 대사, 통일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덩샤오핑 복권시키고 차기 지도자 만든 저우언라이”

정 교수는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저우언라이 관련 자료 수집과 현지 답사, 친척 및 전문가 인터뷰 등을 거쳐 저술 작업을 했다. 지난해에는 1차 북핵 위기와 황장엽 망명사건에 초점을 맞춘 ‘정종욱 외교 비록’을 낸 바 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잠시 머물고 있는 정종욱 교수와 인터뷰를 했다.

- 언제부터 이 책을 준비했는가?

“1970년 대 초반 미국 유학 중일 때였다. 중국을 방문한 키신저가 저우언라이(이하 저우로 약칭)와 비밀 회담을 하고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처음 중국을 방문해 미·중 데탕트가 이뤄질 때, 저우에 대한 기사를 많이 접했다. 1990년대 후반 중국 대사로 근무하면서 중국 학자, 외교관들을 만나 저우와 관련된 얘기 등을 자주 듣고 나누면서 책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정종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명예교수가 최근 저술한 '저우언라이 평전'. 20년 넘는 열정을 바탕으로 현지 답사와 인터뷰, 외교 문서, 단행본 분석 등을 통해 저우언라이를 집대성한 역작이다./민음사

- 수많은 인물 가운데 왜 저우언라이인가?

“무엇보다도 저우는 중국의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그의 역할이나 역사적 기여는 마오쩌둥(이하 마오)이나 덩샤오핑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저우가 없었으면 마오에 의해 망가진 중국을 구할 사람이 없었다. 1950년대 후반 대약진 운동이나 60년대 후반 문화혁명 때 특히 그랬다. 문혁 때 시골로 귀양가 있던 덩샤오핑을 복권시켜 개방·개혁의 길로 나가게 한 데에는 저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정 교수는 “덩샤오핑을 차기 중국 지도자로 확정짓기 위해 저우는 1974년 12월말 의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중병(重病) 상태에서 비행기로 2시간 이상 거리에 있는 마오의 고향 창사를 찾아가 그와 담판을 벌였다”고 말했다.

◇“20년 넘게 자료 수집, 인터뷰, 현지 답사 거쳐 저술”

- 어떻게 저술 및 준비 작업을 했는가.

“199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 미국, 러시아, 동구권에서 공개되기 시작한 비밀문서와 자료들을 수집했고 2010년대 초반 자료 분석을 마치고 집필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예상못한 일들이 생겨 속도가 느렸다. 그러던 중 2018년 여름 저우의 고향인 장쑤성 후이안(淮安)과 텐진에 있는 그의 생가와 학교 등을 답사했다. 또 베이징 공산당 문헌연구실 소속 학자들과 저우의 친조카인 저우빙더(周秉德) 등을 만나 심층 인터뷰했다.”

저우언라이가 생활했던 톈진 소재 난카이 중학교 숙소 모습. 저우언라이는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났으나 큰 아버지의 도움으로 톈진에서 4년간 중학교를 다녔다. 정종욱 교수가 2018년 여름 현지 답사하면서 촬영했다.

◇자녀·재산·시신 등 없는 ‘五無의 삶’...투철한 公人정신

- 저우언라이에게 가장 돋보이는 면모라면?

“투철한 공인(公人)정신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爲人民服務)’라고 쓰인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의 봉사는 ‘오무(五無)’로 표출됐다. 그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고, 남긴 재산이 없었고, 공직 수행에서 사사로움이 없었고, 권력 행사에서 남의 원한을 사지 않았고, 죽은 후엔 시신(屍身)도 남기지 않았다. 저우는 건국 이전에는 공산주의 혁명, 그 후에는 중국 근대화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구도자(求道者)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았다.”

정 교수는 “27년 동안 총리였던 저우언라이가 사용한 사무실 겸 침실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나무 책상과 의자 그리고 평범한 침대 뿐이었다”며 “그는 성실함과 근검절약을 평생 실천했다”고 했다.

- 또다른 장점이 있다면?

“탁월한 대인(對人) 관계이다. 저우는 정치적으로 반대편인 장제스(蔣介石)와 당의 존립이 걸린 중대한 문제를 놓고 수많은 담판을 벌이며 많은 언쟁과 상호 비난을 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필요하면 대화하고 협상할 수 있을 정도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1970년대초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그의 뛰어난 협상력이 빛을 발했다. 키신저나 닉슨도 이 점을 인정한다. ‘기분 나쁜 말을 기분 나쁘지 않게 할 수 있는’ 능력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저우의 집요함은 중국 근대사에서 크나큰 자산이었다.”

1972년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중국을 공식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함께 식사하는 저우언라이 중국 국무원 총리. 닉슨은 저우언라이에 대해 "그는 매우 겸손하지만 침착하고 강인하다"고 평했다./조선일보DB

◇“1975년 4월 김일성의 제2 남침 동참 요구를 거부”

- 저우언라이에 대해 냉혈한이자 출세지향적 배신자라는 혹평도 있지 않나.

“그렇다. 저우는 ‘인민의 소(牛)’가 아니라 마오쩌둥의 소'라는 평가도 있다. 출세지향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우는 절대권력을 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를 피해 갔다. 또 비상한 자기 억제력을 발휘했다. 그가 비굴할 정도로 마오쩌둥에게 추종적이었던 것은 마오에 대한 반항이나 항명이 곧 정치적 사망선고였기 때문이다.”

- 저우언라이는 1950년 당시 공산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서 한국 전쟁에도 간여했는데.

“그는 6.25 발발 한 달 전 김일성이 베이징을 찾아오자, 로시친 주중 소련대사를 불러 중국과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데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1975년 4월 김일성은 베이징에 1주일간 머물면서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는 것은 통일’이라며 제2의 남침에 중국의 동참을 요구했다. 당시 베이징 301병원에 입원해 있던 저우언라이는 ‘평화와 발전이 세계사의 대세’라며 이에 반대했다.”

한국 전쟁중 저우언라이가 펑더화이(彭德懷)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에게 보낸 작전 지시 전문/정종욱 교수

- 저우언라이가 살아난다면 중국의 최근 ‘전량(戰狼·늑대 전사) 외교’를 어떻게 평가할까?

“전량외교에는 중국의 부상(浮上)과 시진핑 정부의 외교 스타일이라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정권 출범 100주년이 되는 2050년까지 ‘안으로 실력을 키우면서 밖으로 고개를 숙이고 저자세를 유지한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를 제시했으나 그게 2035년으로 크게 앞당겨졌다. 이는 2012년 당 총서기가 된 시진핑의 개인적 입장과 맞닿아 있다. 그는 2035년 ‘중국몽’ 달성을 목표로 장기 집권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성장률이 계속 하락하고, 국내외 환경이 만만찮은 상황에서 ‘중국몽’ 달성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국내외에서 강력한 정책을 추진할 수 밖에 없다. ‘늑대 전사’라는 저돌적인 외교 책략은 이런 배경에서 이뤄지고 있다.”

◇”美 바이든 정권에서도 미·중 디커플링 계속 될 것”

-미·중(美中) 관계, 특히 미·중 디커플링(decoupling)은 어떻게 귀결될 것으로 보는가?

“미국 행정부의 대응은 ‘늑대에는 늑대’라는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바이든의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추진 방식이 더 세련되겠지만 양국 간의 대립과 갈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디커플링이 심화될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 있는 대한민국 외교부 청사/조선일보 DB

- 한국의 대응은 어떻해야 하나?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다고 표현한다. 우리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은 이런 상황은 우리가 자초(自招)한 면이 강하다. ‘조정자’니 ‘매개자’니 하는 비현실적인 정책 대안에 미련을 두고 있는 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들어설 적절한 자리를 찾기 힘들다고 본다.”

-그렇다면 미국과 중국에 대한 우리 전략은?

“미국과 중국은 우리에게 다른 성격의 국가이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쉽게 말해 미국은 우리와 가치(價値)를 공유하고 있는 ‘동맹국’으로 일시적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동맹이 되고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중요한 협력 파트너’이다. 중국과 협력을 확대해야 하지만 동맹의 희생이 전제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