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기주봉(67)은 키가 160cm다. 실제로 만나면 더 작아 보인다. 그는 가장 작지만 가장 바쁜 배우다.
영화에서 강인한 형사반장이나 조폭 보스를 도맡고 김정일(영화 ‘공작‘)까지 센 인물을 주로 연기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성취다. 기주봉은 다작의 상징. 조역 전문이지만 영화도 120편, 연극도 120편에 이른다. “한국 영화는 기주봉이 나오는 영화와 안 나오는 영화로 구분된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이 배우가 23~27일 대학로 씨어터 쿰에서 공연하는 연극 ‘건널목 삽화’(연출 방태수)에 나온다. 팔이 없는 사나이를 연기한다. 지난 17일 만난 기주봉은 “어릴 때부터 뒷모습으로도 뭔가 말할 수 있는 ‘등이 열려 있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50년 가까이 하니 겨우 반쯤 열린 것 같다”며 웃었다.
극단 에저또의 ‘건널목 삽화’는 한국 1세대 마임이스트 유진규와 함께하는 2인극이다. 허허벌판의 철도 건널목에서 우연히 철도원(유진규)과 사나이(기주봉)가 마주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연극이라는 게 서로 기(氣)를 불러일으켜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기주봉은 “극단 76단 대표작 ‘관객 모독’과 ‘바냐 아저씨’ ‘엔드 게임’ 이후로 무대는 오랜만인데 생각과 감정을 관객에게 실어 날라야 하는 연극은 역시 쉽지 않다”며 “길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이 다 내 상대역이고 내 스승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 ‘친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와일드 카드’ ‘조용한 가족’ 등으로 기억되는 배우다. 작고 단단하면서 카리스마 있고 리더십 강한 인상과 목소리로 몰입도를 끌어올려주곤 한다. 그는 “식당에서 경찰들이 인사를 하거나 장례식장에서 건달들이 기립해 인사를 받은 적도 있다”며 “당연한 것처럼 쓱 지나갔다”고 했다.
근년에는 홍상수 감독과 약 10편을 작업하며 ‘강변호텔’로 로카르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차지했다. 기주봉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카메라가 돌아가면 연기를 시작하고 꺼지면 연기가 끝나는, 단절된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홍 감독은 대본을 그날그날 써서 주고 진짜 술도 많이 마시며 촬영한다. 기주봉은 요즘 전도연·설경구가 주연하는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을 찍고 있다고 했다.
“연극 ‘건널목 삽화’ 속 철도원과 사나이를 비롯해 우리 모두는 사실 크고 작은 결핍감을 가지고 있다.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관객은 ‘그래 나한테도 저런 게 있지’ 하고 공감하면서 볼 것이다. 작가는 글을 짓고 연출가는 머리로 상상한다면 배우는 같은 장소에서 관객 눈앞에 보이게끔 해야 한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관객이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