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가 젊음을 바쳐 지킨 대한민국은 그동안 많은 업적을 이뤘습니다. 이 상을 받게 돼 무한한 영광이고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12일 전화로 만난 93세 노병(老兵)의 목소리는 마치 참전 당시 피 끓던 20대 청년마냥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미국 텍사스 남부의 국경 도시 미션 시티에 살고 있는 잭 플로이드(93)는 6·25전쟁 참전 용사다. 그는 지난 9일 한국 국가보훈부가 참전 용사에게 수여하는 ‘평화의 사도 메달(Ambassador for Peace Medal)’을 받았다. 이 메달은 2010년 국가보훈부가 6·25 60주년을 기념해 각국 참전 용사들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고자 제정했다.
플로이드가 72년 만에 이 메달을 받게 된 과정엔 한국계 미국인 이훈구(64)씨와의 우연한 만남이 숨어 있었다. 플로이드는 지난해 말 오래된 컴퓨터를 고치기 위해 집 근처 수리점에 들렀다. 수리점 주인이 미국 시민권자인 한국계 이씨였다. 2000년 국내 대기업 법인에서 일했던 이씨는 이후 미국에 정착했다.
이씨가 한국계라는 사실을 안 플로이드는 자신이 6·25 참전 용사라고 말하며 휴대전화에 가지고 다니던 전쟁 사진을 보여줬다. “충성!” 이야기를 들은 이씨가 플로이드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이씨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젊은 시절 헌신적으로 참전하셨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고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플로이드에게 식사를 권유했지만 건강상 이유로 어렵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면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이씨는 휴스턴의 대한민국 영사관에 전화해 “6·25에 참전하신 용사를 위해 한국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참전 증빙 서류를 보내면 대한민국 정부가 주는 ‘평화의 사도 메달’을 받을 수 있다”는 대답을 들은 이씨는 이 사실을 플로이드에게 전달했고 이후 메달이 수여됐다.
11일 본지 인터뷰에서 플로이드는 마치 70여 년 전 일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듯 참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얘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 보급 창고에서 일하던 그는 1951년 미 해병대에 입대했다. 미 해병대는 6·25전쟁에서 한국군을 돕고 있었고, 그는 그 해 12월 14일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미 해군 수송선에 탑승해 한반도로 향했다.
1952년 1월 2일 도착한 한국은 살을 엘 듯이 추웠다. 그가 밟은 한국 땅은 ‘속초리’(현 속초시)였다. “도시라고 할 수도 없는,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였지요.” 미 해병 1사단 1연대 대전차 중대에 배속된 플로이드를 포함해 15명의 군인을 태운 트럭은 동부 38선 포성이 울리는 곳으로 향했다. 10여 개 마을을 지나자 최전방에 도착했고, 멀리 계곡 사이에 북한군이 보였다. 부대는 북한군의 전차 침투를 저지하며 참호전을 벌였다. 2시간 동안 대전차전을 수행하고 약 30m 떨어진 텐트에 들어가 몸을 녹인 뒤 다시 돌아오곤 했다. 플로이드는 “8~10명의 해병대원이 텐트에 들어가 난로에 하키 퍽처럼 생긴 초콜릿 블록을 넣은 핫초코를 만들어 마시며 추위를 견뎠다”며 “정말 지독한 일상(a deadly routine)이었다”고 했다.
1952년 7월 미 해병 1사단은 38선 서부로 이동했다. 그는 본부 및 지원 중대로 이동해 전사자와 부상자 보고 담당이 됐다. 그리고 반년이 흐른 1953년 1월 10일 인천에서 다시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13개월에 이르는 6·25 참전이 그렇게 끝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괴롭힌 건 한반도의 지독한 추위였다고 했다.
플로이드는 이후 베트남전에도 참전했고 해병대에서 육군으로 20여 년을 복무한 뒤 전역했다. 지금도 자신이 목숨을 바쳐 싸운 때를 기억하기 위해 당시 찍은 사진을 휴대전화에 저장하고 다닌다. 플로이드는 “당시 전쟁엔 유엔군과 한국 해병대도 함께 북한군에 대항해 싸웠고 그들은 훌륭한 군인들이었다”며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운 용감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이어 “내 이야기가 한국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가야 했던 사람들의 삶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면서 “전쟁 이후 엄청나게 발전한 한국을 존경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