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무안공항에서 충돌 사고가 발생한 제주항공 사고기 블랙박스에 마지막 4분간의 기록이 저장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 직전 조종사가 외친 조난 신호 ‘메이데이’ 선언도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블랙박스는 항공기가 완전히 파괴되어도 형태가 보존되는 부품인데, 사고 전 수분간의 상황이 기록되지 않은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전문가들은 항공기 엔진 2개가 모두 손상되면서 전기 계통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고, 이에 따라 블랙박스에 정보를 보내는 송신 기능 역시 마비됐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블랙박스가 정보를 받아 기록해야 하는데 받는 정보가 없으니 기록 공백이 나타났다는 얘기다.
이번 사고를 조사하는 국토교통부 항공·철도 사고 조사 위원회는 11일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에서 사고기 블랙박스를 분석한 결과 항공기가 콘크리트 둔덕에 충돌하기 약 4분 전부터 블랙박스 자료 저장이 중단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사고기는 지난달 29일 오전 8시 57분 관제사에게 조류 충돌 경고를 받은 후, 2분 후인 8시 59분 ‘메이데이’를 선언하고 곧바로 고도를 높이는 복행을 시작했다. 이후 1차 착륙 시도 때와 다르게 활주로 반대 방향으로 동체착륙을 시도했고, 9시 3분 활주로 바깥에 있는 로컬라이저(방위각 시설) 콘크리트 둔덕과 충돌했다. 블랙박스는 8시 58분 50초쯤 작동이 멈춰, 조종사의 메이데이 선언도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인규 한국항공대 비행교육원장은 “엔진 두 개가 모두 고장 나 블랙박스까지 작동하지 않은 건 매우 드문 사례”라며 “엔진 고장 후 충돌까지 이유를 밝힐 핵심 자료가 사라져 사건 규명도 난관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항공기 엔진 두 개가 모두 고장 나고 블랙박스까지 작동하지 않은 건 전문가들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드문 사고 형태다. 실제 블랙박스는 섭씨 1000도 이상의 열과 6000m 아래 수심에서도 견디게끔 만들어진다. 항공기 외형이 완전히 파괴되는 사고에서도 거의 형태를 보존한다. 지난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고로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에서도 블랙박스는 사고를 고스란히 기록했다.
이번 사고에서 블랙박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건 전기 동력 문제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항공기 전원 공급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엔진 두 개가 모두 작동 불능 상태가 되면서 전기 계통에 문제가 발생했고, 블랙박스에 제대로 된 정보를 주는 기능 역시 불능이 됐다는 것이다. 정윤식 가톨릭관동대 항공운항학과 교수는 “사고 직전까지 제대로 기능했던 블랙박스가 갑자기 작동하지 않았다”며 “전기 계통 문제로 블랙박스의 데이터 수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기록이 안 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항공기엔 엔진과 별도로 APU라고 불리는 보조 동력 장치가 있긴 하지만, 별도로 가동시켜야 하는 데다 일부 장치 전원과만 연결돼 있어 블랙박스에 대한 정보 송출까진 맡지 못한다.
실제 항공기가 자신의 위치, 속도 등을 외부로 보내는 전파 신호인 ADS-B(항공기 위치 탐지 시스템) 역시 오전 8시 58분을 마지막으로 송출을 멈췄다. 이는 블랙박스가 작동을 멈춘 시간과 거의 동일하다. 이 신호 역시 전원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작동하지 않는다.
일각에선 블랙박스의 전원 공급 자체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블랙박스로 전기 공급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이 장치가 작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 블랙박스는 항공기의 속도·고도·엔진 상태 등 비행 데이터를 기록하는 비행 기록 장치(FDR)와 조종실 내 대화 등 음향 정보를 기록하는 음성 기록 장치(CVR)로 나뉘는데, 2018년부턴 CVR에 보조 배터리 역할을 하는 비상 장치를 달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2009년 만들어진 제주항공 사고기(기종 B737-800) 블랙박스에는 이 같은 역할을 하는 장치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고 원인을 가릴 핵심 데이터인 블랙박스 기록이 사라지면서 사고 원인 조사, 향후 책임 소재를 두고 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고의 정확한 규명을 위해선 ‘조류 충돌 후 왜 복행을 했는지’ ‘1차 착륙 시도와 반대 방향으로 착륙한 이유는 무엇인지’ ‘랜딩 기어는 왜 수동으로 내리지 않았는지’ 등을 밝혀야 한다. 블랙박스 데이터가 없으면 결국 조류 충돌 후 벌어진 상황은 추정으로 복원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견해다.
더 큰 문제는 향후 벌어질 책임 공방이다. 사고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이나 엔진 제작사인 CFMI의 책임을 따지기 위해선 블랙박스를 통한 사고 원인 규명이 선제돼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 증거물이 사라지면서 보잉, CFMI 측이 과실을 인정하지 않고 제주항공 등에 책임을 떠넘기려 할 것이란 견해도 제기된다. 황호원 항공대 교수는 “제주항공 등이 앞으로 보잉 등에 책임을 묻기 위해선 블랙박스 등을 통한 원인 규명이 핵심인데, 블랙박스가 없다면 법적 대응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