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공항 사고 현장에서 수거한 제주항공기 블랙박스. 속도·고도 등이 기록된 비행 기록 장치(FDR·Flight Data Recorder)는 전원-자료 저장 유닛 간 커넥터(위쪽 사진 그을린 부분)가 일부 손상됐다. 조종실 대화·지상과 교신 등이 담긴 음성 기록 장치(CVR·Cockpit Voice Recorder)는 외관은 온전했지만 FDR과 마찬가지로 둔덕 충돌 폭발 약 4분 전부터 자료 저장이 중단됐다(아래사진)./연합뉴스

주요 항공사고에서 블랙박스는 사고의 진실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항공사고 특성상 생존자나 목격자가 없는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고, 타국이나 상공에서 사고가 나 원인 규명이 어려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블랙박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 사건으로는 ‘대한항공(KAL) 007편 격추 사건’이 있다.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서울로 향하던 도중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해당 비행기는 소련군 전투기에 격추됐다. 이로 인해 승객과 승무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국제사회의 비판이 이어지자 당시 소련은 “비행기가 고의로 영공을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1991년 블랙박스 기록이 공개됐고, 해당 항공기는 조종사 실수와 항법 장비 오작동으로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에 들어갔던 것으로 나타났다. 소련의 주장과 달리 고의 침범이 아니었던 것이다.

1997년 8월 6일 254명 중 228명이 사망한 대한항공 여객기 괌 추락 사고 때도 블랙박스 분석을 통해 조종사의 과실과 기상 조건, 괌 공항의 지상 관제 레이더 부족 문제가 복합적 원인이라는 점이 밝혀진 바 있다. 해외 항공사고도 마찬가지다. 2015년 독일 저먼윙스 9525편은 비행 중 알프스산에 추락해 150명이 사망했고, 원인에 대해선 ‘테러다’ ‘기체 결함이다’ 등 추측만 난무했다. 그러나 음성 기록 장치(CVR) 분석을 통해 우울증을 앓던 부기장이 고의로 항공기를 추락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9년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프랑스 파리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447편이 대서양 상공에서 실종되는 사고가 있었는데, 블랙박스가 없어 원인 규명을 못 하다가 2년 뒤 블랙박스가 심해에서 발견돼 조종사 과실이 주요 원인이었다는 점이 알려졌다.

블랙박스를 통해 명확히 사고 원인을 규명해야 재발 방지도 가능하다. 2002년 4월 15일 중국국제항공 여객기가 부산 김해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가 산악 지역에 충돌해 129명이 사망하고 37명이 생존한 사고가 있었다. 당시 블랙박스를 분석한 결과 조종사가 나쁜 기상 조건에서 착륙하려다 실수한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후 김해공항은 ‘기상 상태가 나쁜 경우 착륙 불가능’ ‘사고 활주로에 선회 접근할 경우, 시계비행(조종사가 육안으로 외부 지형지물을 참조하면서 비행)을 한다’ 등 착륙 과정에서의 안전 절차를 강화했다. 2023년 김포공항 대한항공 여객기 활주로 정지선 침범 사고에서도 블랙박스 조사를 통해 조종사·관제사 간 영어 발음 차이가 원인이었다는 점을 밝혀내 관제사 재훈련 등 재발 방지책이 마련됐다.

☞주황색인데 왜 블랙박스일까

항공기 사고 원인을 밝히기 위해 탑재하는 비행 자동 기록 장치. 속도·고도·엔진 상태 등 비행 데이터를 기록하는 비행 기록 장치(FDR)와 조종실 내 대화, 지상과의 교신 내용 등을 담은 음성 기록 장치(CVR)가 있다. 섭씨 1100도에서 30분, 수심 6000여m 압력에서 한 달을 버틸 수 있도록 제작한다. 명칭(블랙)과 달리 발견하기 쉽도록 주황색 등으로 칠한다. 블랙박스라는 이름은 20세기 중반 항공기에 탑재했던 검은색 박스 모양의 항법 보조 장치를 지칭하는 데 처음 사용됐는데, 이후 의미가 변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