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전 서울대입구역 근처 한 스터디 카페. 밖은 해가 환하게 비칠 시간이지만 내부는 컴컴했다. 방에 들어오는 빛은 검정 블라인드로 완전히 차단된 상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어린 왕자’예요. 오늘 어떤 고민이 있어 오셨어요?”

이날 기자는 조금 특별한 심리 상담을 받았다. 어둠 속에서 상담을 진행한 상담사 ‘어린 왕자’는 시각장애인 A(51)씨. 상담은 서로 생김새나 옷차림, 표정은 일절 보지 못한 채 소리에만 의존해 진행됐다.

지난 24일, 기자가 어둠 속에서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 '어린 왕자'와 상담하고 있는 모습. 사진 촬영을 위해 잠깐 불빛을 비췄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시각장애인에게 받는 ‘마음보듬’

이 상담 서비스 이름은 ‘블라인드 마음보듬’. 말 그대로 어둠 속에서 시각장애인 ‘마음보듬사(상담사)’들과 심리 상담을 진행하는 서비스다. 이곳에서 일하는 마음보듬사 7명은 모두 시각장애인이고, 이 중 6명이 중증 시각 장애를 앓고 있다.

사업을 운영하는 단체는 서울대 재학생 다섯 명이 모인 ‘봄그늘 협동조합’. 2018년부터 ‘블라인드 마음보듬’ 사업을 시작했다. 이서영(24) 조합원은 “시각장애인은 직업 선택권이 극히 제한적이다. 특화된 직업을 개발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고심하던 중 ‘어둠 속 상담’을 떠올렸다”고 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조사에 따르면, 2019년 시각장애인 고용률은 41.9%. 같은 해 전체 인구 고용률(60.9%)의 3분의 2 수준이다. 특히 여성 시각장애인 고용률은 25.9%, 중증 시각장애인 고용률은 18.5%로 더 낮았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들을 마음보듬사로 고용하는 이유가 단순히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했다. 이 조합원은 “시각장애인은 어둠 속에서 장시간 일하는 근무 환경에 비장애인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다. 또 청각이 발달해 있어, 고객의 고민을 더 섬세하게 들어줄 수 있다”고 했다.

이날 기자를 상담한 ‘어린 왕자’ A씨는 12년 전부터 망막 색소 변색증을 앓게 된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장애 초기에는 웹 디자인을 공부했지만, 곧 시력이 나빠지면서 취업을 포기했다. 이후 동료 장애인 상담 업무 등을 하다 2년 전부터 이곳에서 마음보듬사로 일하고 있다. A씨는 “어둠 속에서는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 상담할 때만큼은 내가 장애인이란 생각을 잊을 수 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 상담사라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마음보듬사로 선발된 시각장애인은 실제 상담에 투입되기 전 총 80시간의 사전 교육을 받는다. 업무 시작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상담 관련 교육을 받고 있다. A씨도 심리상담사 2급·미술심리상담사 1급 등 다양한 자격증을 취득했다.

'블라인드 마음보듬' 서비스를 운영하는 '협동조합 봄그늘' 조합원들. 왼쪽부터 유혜수(21), 이서영(24), 유연수(23) 조합원이다. 마음보듬사 '어린 왕자' A씨는 "마음보듬 일을 하면서 내 마음도 치유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어둠 속에서, 익명으로 상담”

상담은 철저히 익명으로 진행된다. ‘어린 왕자‘ ‘눈꽃‘ ‘바다‘ ‘다이어리‘ 등으로 불리는 상담사처럼 고객도 별명을 지어야 한다. 상담 전후에도 고객에게 별도의 인적 사항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유연수(23) 조합원은 “치료 목적의 기존 상담 서비스는 피상담자가 자신의 속을 낱낱이 드러내야 해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익명을 바탕으로 하는 ‘블라인드 마음보듬’은 공감과 경청에 무게를 뒀다”고 했다.

50분 상담료는 2만5000원. 2018년 5월 서비스 시작 후 지금까지 총 450여 회 상담이 진행됐다. 유혜수(21) 조합원은 “상담 건수가 많지는 않지만, 서비스를 두 번 이상 이용한 고객 비율이 50%를 넘을 정도로 만족도가 높다”고 했다.

‘블라인드 마음보듬’은 올 3월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중증 장애인 고용 모델 개발·확산 사업에 선정됐다. 조은기 봄그늘 대표는 “사업을 확장해 더욱 많은 시각장애인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이날 기자는 ‘보아뱀’이란 별명을 쓰면서 ‘어린 왕자’에게 마음속 고민을 맘껏 털어놨다. 상담이 끝날 즈음 ‘어린 왕자’는 “오늘 말한 내용은 서로 비밀에 부치자”고 했다. 어둠 속에서 ‘보아뱀’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