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놈의 건물 때문에 부산에 바람 잘 날이 없어요.”

24일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 엘시티를 바라보며 부산 시민 이영심(59)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부산 사람들한테 엘시티는 애증의 대상”이라고 했다. 2019년 완공된 이 건물은 101층짜리 랜드마크 타워 1동과 85층짜리 아파트 2동으로 이뤄져 있다. 최고 높이는 411.6m로 서울 송파구의 제2롯데월드타워에 이어 국내에서 둘째로 높다. 사업비만 2조7400억원에 달하는 대사업이었다. 수십억을 호가하는 아파트는 물론, 6성급 호텔, 쇼핑몰, 워터파크, 미술관과 전망대 등이 차례로 입주할 예정이다. 지역민들 사이에선 엘시티가 부산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찾는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란 기대가 높다. 하지만 반칙과 특권의 상징이라는 비판도 높다. 이 건물을 짓기 위한 인허가 및 시행사 운영과 관련해 각종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은 탓이다.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정·관계 인사 24명이 엘시티 비리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101층짜리 주상복합 건물 엘시티는 부산 해운대 백사장 코 앞에 있다. 그 입지와 규모 때문에 건설 전부터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일보DB

최근에는 엘시티 시행사가 아파트 분양 과정에서 부산 지역 유력 인사들에게 특혜를 줬다는 의혹이 불거져 부산지방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가 수사에 착수했다. 다음 달 있을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국민의힘 소속 박형준 후보 역시 이 엘시티에 살고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불어민주당은 “박 후보 역시 특혜 분양을 받은 것 아니냐”는 비방전을 전개하는 중이다. 박 후보 측은 “정상적인 분양 과정을 거쳐 구입한 것일 뿐 아무런 특혜나 대가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엘시티를 둘러싼 비리와 특혜 의혹이 끊이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이 건물의 입지와 규모 때문이다. 엘시티는 해운대 해수욕장 동쪽 백사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정도에 있다. 그야말로 해운대 바닷가가 코앞에 펼쳐진 명당이다. 부산시에 따르면 엘시티 부지는 원래 국방부 소유 땅으로 2007년 시에서 호텔과 콘도 등 관광객 유치를 위한 상업시설로 개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업권을 따낸 민간 컨소시엄에서 상업시설만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급 아파트를 포함한, 초대형 주상복합 건물 건설을 추진하면서 문제가 시작됐다.

엘시티 부지는 해운대 경관을 일부 사람만 독점하도록 허용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주택 건설이 금지된 지역이었다. 또한 해안 경관 개선 지침에 따라 건물 역시 높이 60m 이하로만 지어야 한다는 규제가 있었다. 하지만 엘시티 건설 과정에서 이런 규제와 금지 지침이 모두 적용되지 않았다. 2009년 부산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엘시티 부지에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건물 고도 제한도 풀어줬다. 이 결정 과정에 관여했던 부산시 전직 공무원 김모씨는 “그 당시엔 부산 해운대 관광 활성화를 위한 랜드마크 조성이란 정책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며 “엘시티 부지는 그런 정책 목표를 위해 특별계획구역으로 지정해 규제를 한시적으로 풀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규제 해제가 워낙 파격적이었던 탓에 부산 지역사회에선 엘시티 건설을 둘러싼 금품 로비가 있었을 것이란 소문과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2016년 엘시티 시행사 소유주였던 청안건설 이영복 회장이 엘시티 인허가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정·관계 인사들에게 뇌물을 뿌린 혐의가 드러나면서 검찰이 나섰다. 수사 과정에서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해운대 지역구인 배광덕 전 새누리당 의원 등이 이 회장에게 수천만~수억원대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실형을 받았다. 이 회장 역시 2018년 대법원에서 뇌물 제공 혐의 등으로 6년형을 최종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또한 2018년 건설 공사 중에 추락 사고로 인부 4명이 숨지는 일이 있었고, 작년 9월 태풍 ‘마이삭’이 들이닥쳤을 때 건물 외벽 타일과 시설 구조물이 뜯겨나가는 등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엘시티 관련 비리 의혹은 현재 진행형이다. 경찰에 따르면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인 건은 이 회장이 130여 명에 달하는 정·관계 유력 인사를 대상으로 엘시티 아파트 중 입지가 좋은 로열층 등을 사전에 지정해서 제공하는 식으로 특혜 분양을 했다는 혐의에 관한 것이다. 경찰은 이 특혜 분양자들의 구체적인 신상 정보는 물론, 그들에게 제공할 아파트 동호수와 평수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리스트를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수사를 진행 중이다. 이 리스트에는 국회의원과 장관, 검사장·법원장 등 정·관계 인사는 물론, 부산 지역 기업인, 병원장, 언론사 대표까지 다양한 이들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옥중에 있는 이 회장 대신 엘시티 시행사를 운영 중인 아들 이모씨를 최근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 조사했다”며 “그쪽에선 특혜 분양이 아니라 미분양을 대비해 만들어둔 영업용 리스트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엘시티 특혜 분양 리스트에 박형준 후보의 이름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