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리는 내 미국 아버지 데이비드 오메셔의 91번째 생일을 맞아 아주 오랜만에 가족 모임에 참석했다. 데이비드는 1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매리 오메셔와 사이에 아들 둘, 쌍둥이 딸을 두고 뉴저지주 뉴턴 타운에 살고 있었다. 1982년 여름, 이 백인 가족은 한국에 있는 선교사 배리 플리트크로프트에게서 부탁을 받는다. 조만간 미국에 도착할 시각장애인 유학생을 좀 도와주라는 부탁이었다. 그들은 친한 친구였던 선교사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를 마중하러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나왔을 때, 매리와 데이비드는 내가 머지않아 자신들을 ‘Mom(엄마)’과 ‘Dad(아빠)’로 부르는 아들이 될 것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나는 오버브룩 맹학교의 초청으로 1982년 7월 15일 미국 유학을 왔다. 열다섯 살이었고, 눈앞의 불빛도 가늠하지 못하는 중증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리고 영어는 단어 100개 정도를 아는 수준이었다. 유학 허가를 신청하러 문교부를 방문했던 내 어머니에게 담당 직원은 ‘어떻게 앞을 못 보는 어린 아들을 혼자 유학 보낼 생각을 하느냐’면서 나무랐단다. 요즘은 조기 유학도 흔해졌고 장애인의 유학도 그리 드물지 않지만, 내가 알기론 그렇게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난 한국 시각장애인 학생은 내가 처음이었다. 문교부 직원이 걱정할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직원도 나의 어머니도 내 앞날이 어떻게 될지 그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플리트크로프트 선교사가 부탁한 것은 미국의 가을 학기 시작 6주 전부터 나를 데리고 있으면서 영어 대화를 가르치고 미국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학기가 시작되면 집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오버브룩 맹학교에 나를 데려다주고, 기숙사가 문을 닫는 추수감사절 주말과 크리스마스 방학에는 나를 다시 집으로 데려와 같이 지내달라고도 했다. 또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달라는 부탁도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 나는 그들을 앤트(aunt) 매리, 엉클(uncle) 데이비드로 불렀다. 이모나 삼촌 같은 개념으로.
전액 장학금을 주면서까지 나를 초청해준 오버브룩의 교장 선생님과 이사님들에겐 미안했지만, 나는 그곳에서 계속 공부를 하지 못했다. 내가 꿈꿨던 학업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맹학교 학생도 일반 학교 학생이 쓰는 교과서를 사용하면서 공부했었다. 글이 점자라는 것 외에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런데 오버브룩은 다른 미국 맹학교들과 마찬가지로 학생의 지적 수준에 따라 학업 내용에 차등을 뒀다. 한국과 비교했을 때 학생들의 학구열이 그리 높지도 않았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고민에 빠졌다. 그런 나에게 오메셔 부부는 자신의 집에 살면서 근처에 있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라는 제안을 했다. 그 말이 나를 미국에 붙잡았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을 Mom, Dad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Little Brother’, 그러니까 막냇동생이 되었다.
아버지 데이비드의 91번째 생일상. 식탁에는 내 아내 그레이스가 준비한 불고기와 잡채, 만두와 김치와 밥, 그리고 메인주에서 6시간 운전해서 온 누나 마르타가 만든 샐러드가 차려져 있다. 주방에는 오메셔 가족의 최고 디저트, 아버지가 손수 만든 사워 크림 애플파이 두 개가 오븐에서 갓 나와 식혀지고 있다. 아버지와 누나 마르타, 형 데이비드, 형수 수잰과 그의 자녀들, 우리 식구 등 모두 10명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나를 키운 부모를 본 형 데이비드와 누나 마르타는 그들 자신도 아이를 입양했다. 내 조카 브라이스와 매슈는 흑인이고, 조카사위인 대니얼은 콜롬비아에서 온 친구다. 또 할아버지 생신 파티에 오지 못한 마르타의 딸은 과테말라에서 왔다. 결국 같이 밥을 먹은 식구 중 백인은 4명뿐이었고, 한국인 3명과 흑인 2명, 그리고 콜롬비아인 1명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우리는 이렇게 찬란한 가족을 가능케 해주신 아버지 데이비드의 생신을 함께 축하했다.
나와 아내 그레이스가 우리 딸 예진이를 한국 보육원에서 데려와 키우게 된 것이 사실 오메셔 가족에게는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이런 가족 관계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예진이가 우리 가족이 된 2014년 4월 이후, 왜 딸의 성이 나머지 식구들의 성과 다르냐는 질문을 한 사람들은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뿐이었다. 신씨 세 명과 박씨 한 명이 기록되어 있는 건강보험 카드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한 미국 의사는 한 명도 없었는데 말이다. 대체 혈연이 뭐기에.
이 문제가 우리 가족을 더 곤란하게 만드는 상황을 근래 알게 되었다. 이번 여름에 우리 가족은 한국에 가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2주 동안 함께 자가 격리를 하고, 그 후 약 2주를 더 한국에 있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예진이가 법적으로 ‘남’이라는 이유로 격리를 따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한국 보육원 출신인 예진이를 7년 넘게 키우고 있지만, 정식 입양 절차는 밟지 않았다. 우리 부부의 국적이 한국이 아닌 탓에 입양 절차가 극도로 복잡했기 때문이다.
대체 혈연 관계와 동반 격리 여부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비행기를 따로 타고 와도 혈연 관계라면 같이 격리해도 되고, 같은 집에서 같이 살아온 식구들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해도 혈연 관계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격리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격리는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는 정책인데, 여기서 혈연 관계가 왜 중요할까?
한국은 혈연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회다. 그래서 입양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아이들은 왜 그렇게 많은 걸까? 한국에서 태어난 아기 80명 중 한 명은 보육 시설에 맡겨진다고 들었다.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