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낀 몇 백원이 누군가의 눈물이고, 내가 절약한 시간이 누군가의 피땀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물과 피땀으로 편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IT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김남훈(37)씨는 최근 2년간 이용했던 쿠팡 멤버십을 해지하고 회원 탈퇴까지 했다. 쿠팡 배송 기사의 잇따른 사망과 이천 덕평물류센터 화재를 계기로 불매 운동이 빠르게 확산하면서다. 지난 19일에는 ‘쿠팡 탈퇴’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17만건 이상 올라오며 국내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1위에 올랐다. 김씨는 “2년 동안 새벽 배송을 편리하게 써왔지만, 택배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소비자라도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다른 사람 고통 주면서 편하게 살고 싶지 않다”
시작은 쿠팡이었지만 논란은 ‘총알 배송, 새벽 배송이 꼭 필요한가’로 번졌다. 프리랜서 정모(37)씨는 새벽 배송을 쓰지 않고 직접 마트에 가서 장을 본 지 오래됐다. 정씨는 “육아나 장시간 노동으로 새벽 배송이 꼭 필요한 분도 있지만, 누군가는 새벽에 일해야 하는 새벽 배송을 대다수가 이용해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다 같이 일하는 시간을 줄여서 퇴근 후엔 마트에 갈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닐까요. 유럽에선 저녁엔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밤에는 배달도 안 되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은 우리보다 높잖아요.”
2015년 국내 최초로 마켓 컬리가 새벽 배송 서비스를 도입하면서 쿠팡을 비롯해 신세계·롯데·현대까지 유통업계 곳곳에서 새벽 배송에 뛰어들었다. 쿠팡은 ‘로켓배송’과 직접 고용한 ‘쿠팡맨’을 내세워 국내 대표 이커머스 기업으로 떠올랐지만 열악한 노동 환경이 드러나며 소비자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과열된 배송 경쟁으로 속도와 안전을 맞바꾼 건 아닌지, 총알 배송·새벽 배송이 꼭 필요한 서비스인지 돌아봐야 할 때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갑년 고려대 독일학 전공 교수도 “내가 얻는 작은 편의를 위해 많은 이가 고통받아야 한다면 총알 배송·새벽 배송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독일에서 저녁만 되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 건 가게 주인이나 다른 노동자도 저녁이 있는 삶을 누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거든요. 일찍 받으면 좋기야 하지만, 총알 배송이나 새벽 배송으로 주문하는 물건 중에 정말 그렇게 시급히 받아야 할 물건이 있나요?”
총알 배송·새벽 배송 서비스가 문제가 아니라 택배 기사의 근로 환경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야근이 잦아 새벽 배송을 자주 이용한다는 직장인 이모(29)씨는 “불매 운동이 오히려 일자리를 줄이는 등 노동자의 불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지 않나”라면서 “택배 기사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지 못하는 시스템을 고쳐야지 서비스 자체를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한 네티즌이 올린 “로켓배송이 필요한 삶과 로켓배송 일자리가 필요한 삶이 촘촘히 엮여, 대부분이 잘못됐다고 느끼면서도 옴짝달싹 못 하게 되는 것 같다”는 글은 4000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으며 공유됐다.
◇느린 배송으로 맞서는 달구지·거북이 택배도 등장
총알 배송에 맞서 ‘느린 배송’을 내세우는 업체들도 등장했다. 온라인몰 퍼밀은 소비자가 주문한 채소나 과일이 최상 품질에 이르기까지 기다렸다가 배달하는 ‘달구지 배송’으로 소비자의 호응을 얻었다. 조금 느리더라도 품질을 중요시하는 이들을 겨냥한 마케팅이다. 동작구에선 어르신 일자리 창출을 위한 ‘거북이 택배’ 사업을 운영 중이다. 느리지만 성실히 배달한다는 뜻으로 오토바이 퀵 서비스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객이 늘고 있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착한 소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결과이기도 하다. 지난해 한국리서치가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62%는 ‘공동체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소비해야 한다’고 답했다. ‘가격이 저렴해도 비윤리적 기업의 제품이라면 구매하지 않겠다’는 응답자도 65%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