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어느 대선 때보다 사무실 구하기 경쟁이 치열해요. 후보는 많지, 들어갈 건물은 적지. 덕분에 여의도 오피스 빌딩에 공실이 많이 줄긴 했죠.” 서울 여의도 국회 일대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김모씨가 말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서(西)여의도는 ‘정치 골목’으로 불린다. 대선, 총선 등 선거철마다 선거 캠프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일대 빌딩은 귀하신 몸이 되는데, 올 대선은 역대 최고라고 한다.
당내 경선에 뛰어든 후보가 20여 명에 육박하는 등 과거 어떤 대선보다 후보로 뛰겠다는 사람이 많다. 게다가 여의도 일대에 최근 철거되거나 재건축에 들어가는 빌딩도 있어 물량도 넉넉지 않다. 빌딩 입주를 둘러싸고 치열한 기 싸움도 펼쳐진다. ‘아무튼, 주말’이 대선 캠프가 들어선 서울 여의도와 광화문 일대를 둘러봤다.
◇너도 나도 대선후보에... 전셋집만큼 귀하다?
“정치인들·기자들 밤낮없이 드나들죠, 화장실은 더럽죠. 정말 달갑지 않다니까요.” 지난 6일 여의도 국회 앞 한 대선 후보 캠프 사무실이 차려진 빌딩. 지하 1층 관리사무실에서 만난 관리인에게 ‘대선’ 얘기를 꺼내니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물어볼 것만 물어보고 빨리 나가라”고 말했다.
‘대선 캠프’는 대선 후보와 지지자들이 전략을 짜거나 선거운동을 효율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마련하는 사무실. 후보 가운데는 현직 국회의원도 많은데 왜 굳이 외부 사무실에 캠프를 꾸릴까. 우선 커다란 사무실에 의원 수십 명과 참모진이 우르르 드나드는 장면을 연출해 세(勢)를 과시한다는 측면이 있다. 보안 유지를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서로 다른 대선 후보 캠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도 아는 경우가 많은데 국회 내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중요 정보가 새나갈 우려가 있다”고 했다.
서여의도 일대엔 어림 잡아 40개가 넘는 빌딩(오피스텔 등 일부 제외)이 있다. 한 부동산 관계자는 “과거 대선 캠프가 차려졌던 ‘금영빌딩’이 재건축에 들어갔고, ‘신동해빌딩’은 철거됐다. ‘남중빌딩’은 현재 국민의힘 당사여서 캠프가 들어설 수 없는 상황이어서 예년 대선 때보다 여의도 일대에 캠프 차릴 공간이 넉넉지 않다”고 말했다.
여의도 일대 부동산에 따르면 이 지역 한 달 사무실 임대료는 대체로 3.3㎡(1평)당 4만~5만원 선(보증금 제외)이지만 대선 캠프에는 더 비싸게 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 부동산 관계자는 “캠프에 드나드는 외부인이 많아 화장실 등 관리하는 데 손이 많이 간다는 이유 등으로 평균 시세보다 비싸게 받는다”며 “건물주 입장에선 공간을 비워두느니 임대료를 받는 게 낫지만, 같은 값이면 일반 회사가 입주하는 걸 선호한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 캠프에 관련된 한 정치인이 술 취해 소란을 피워 관리인이 말렸더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느냐’며 진상을 부려 혼난 적도 있다”고 했다.
여의도 바닥에서 최고 명당으로 알려진 곳은 ‘대하빌딩’이다. 지하 4층·지상 12층짜리 이 빌딩엔 지금까지 대통령 3명(김대중·이명박·박근혜)과 서울시장 2명(조순·고건)이 캠프를 차려 당선됐다. 임대료도 가장 비싸다. 하지만 이번엔 대선 후보 누구도 아직 입주하지 못했다. 대하빌딩 관리자는 “여야 할 것 없이 여러 후보가 들어올 수 없느냐고 물어왔지만, 지금은 빈 사무실이 없다”고 했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누구는 받아주고 누구는 안 받아주고 하면 골치 아플 수 있으니 대하빌딩 입장에서는 아예 안 받는 게 속 시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하빌딩 소유주는 13대 평민당 국회의원 출신인 김영도(92) 하남산업 회장. 그는 집안의 나무 한 그루도 풍수지리 전문가에게 물은 뒤 옮겨심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름에 山·河 들어간 빌딩이 명당?
민주당 주요 후보들은 대하빌딩 인근 다른 빌딩에 둥지를 틀었다. ‘극동 VIP 빌딩’에는 이재명 경기지사와 최문순 강원지사가 지난달 입주했다.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이 캠프를 차렸던 곳이다. 최 지사 측 관계자는 “5월 말쯤 빌딩에 찾아가 문의했다. 관리인과 얘기하는 도중 다른 후보 측에서 전화를 걸어 사무실을 찾는다고 얘기하더라.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해 그날 바로 계약했다”고 말했다. 이 지사 측 정성호 의원은 “과거 누가 여기서 당선됐는지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기존과는 다른 선거 운동을 지향하고 있어, 캠프는 최소한으로 꾸렸다. 실평수가 70평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낙연 전 총리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캠프로 사용한 ‘대산빌딩’에 입주했다. 이 전 총리 측 관계자는 “이 전 총리가 작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나갔을 때부터 이용하던 곳이다. 여의도에서 유명한 빌딩이라는 소문이 있는 곳인데, 때마침 빈 사무실이 있어서 입주했다”고 말했다. 정세균 전 총리는 ‘용산빌딩’ 11층과 13층에 들어갔다. 캠프 관계자는 “엘리베이터가 홀·짝수 층별로 서다 보니 아래 위층이 아니라 두 층 건너 구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는 “대하빌딩, 용산빌딩, 대산빌딩처럼 이름에 산(山)이나 물(河)을 뜻하는 글자를 넣은 건물이 많은데, 풍수나 사주에서 문서와 돈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은 후보들은 비교적 구석진 빌딩에 자리 잡았다. 박용진 후보는 여의도 ‘오성빌딩’에 캠프를 차렸다. 캠프 관계자는 “우리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고려해 사무실을 구했다. 박 후보가 당선되면 이 빌딩이 명당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양승조 충남지사 캠프는 여의도 ‘삼보빌딩’에 있는 20㎡(6평) 정도 크기 자그마한 사무실에 꾸려졌다. 박상호 충청남도 정무보좌관은 “서울에서 회의하는 공간으로 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지난 1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김두관 의원은 아직 캠프 사무실이 없다. 김 의원 측은 “이전에 고려한 곳엔 이미 다른 후보들이 입주했더라. 건물주가 단기 임대를 꺼려 사무실 구하기가 쉽지 않다. 아예 국가 균형 발전 차원에서 부산에 캠프를 차릴까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석열 둥지 튼 ‘이마빌딩’은 정도전 집터
야권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어디에 캠프를 차릴지는 적지 않은 관심사였다. 그가 택한 곳은 서울 광화문 근처 수송동 ‘이마(利馬)빌딩’ 9층. 보증금 1억5000만원에 임차료는 월 1500만원 선이며, 윤 전 총장이 사비로 전액 부담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6일 찾아간 이곳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윤 전 총장이 아직 정당에 몸담지 않은 점을 염두에 둬 여의도와 거리를 둔 광화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2012년 무소속으로 대선에 나섰을 때, “여의도 정치에서 벗어나겠다”며 서울 종로구 공평동의 ‘공평빌딩’에 캠프를 차린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당시 안철수 후보 캠프에서 일했던 한 핵심 인사는 “여의도를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좋았지만, 여의도식 정치가 필요할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약점이었다”고 말했다.
1983년에 지은 이마빌딩은 명당으로 꼽힌다. 고려 말·조선 초 정도전이 ‘백자천손(百子千孫·아들 100명과 손자 1000명)’ 할 수 있는 명당으로 보고 집을 지어 살았던 곳이다. 김두규 교수는 “청와대 뒤 북악산에서 물줄기가 내려와 삼청공원을 거쳐 이곳으로 이어진다. 예전부터 공무원을 꿈꾸는 사람이 자리 잡으면 잘된다는 얘기가 있던 곳”이라고 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위원회에서 풍수가 좋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이 건물에 사무실을 차렸다는 얘기가 있다. 당시 한국은 일본보다 한참 늦게 유치 활동에 뛰어들었지만 극적으로 공동 개최권을 따냈다.
반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2002년 대선 당시 이마빌딩에 캠프를 차렸지만 대권을 잡는 데 실패했다. 한 전직 국회의원은 “풍수를 전문으로 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마빌딩은 정도전처럼 기가 강한 사람에게는 명당이지만, 반대로 약한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떠돈다”고 했다.
◇사무실 없는 ‘모바일 캠프’도 등장
국민의힘 경선 레이스는 민주당보다 늦게 시작한다. 이 때문에 사무실 구하는 것도 다소 늦다. 다만 유승민 전 의원은 작년 11월 여의도 ‘태흥빌딩’에 사무실을 차렸다. 유 전 의원이 창당한 바른정당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최원기 비서실장은 “50여평 되는 공간에 10여명이 상주한다. 바른정당 시절 새 정치 실험을 했던 곳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택했다”고 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정세균 전 총리가 입주한 용산빌딩에 캠프를 차릴 예정이다. 이 밖에 대선 출마를 선언했거나 의사를 내비친 홍준표·하태경·김태호 의원, 황교안 전 총리 등은 “사무실을 물색하는 중”이라고 했다.
아예 사무실을 두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보도 있다. 지난 2일 출마를 선언한 윤희숙 의원 캠프는 “모바일에 캠프 사무실을 차려 모든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