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발표한 ‘2022학년도 대학 수학능력시험(수능) 응시원서 접수 결과’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제2외국어·한문 영역’을 선택한 학생 수가 6만1221명으로 전년 대비 20.7%나 떨어졌다. 전체 수능 지원자가 50만9821명으로 3.3% 증가한 것을 감안하면 급격한 감소다. 얼마 전 중등교원(중·고교 교사) 선발에서 24년 만에 중국어 교사를 한 명도 뽑지 않을 예정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국어 기피 현상’이 화제였지만, 교육 현장에선 “중국어만 문제가 아니라 모든 제2외국어가 말라 죽어가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제2외국어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자료=서울시교육청, 한국교육과정 평가원

◇서울 공립고 독일어 전임 교사 0명

외국어 전문가들은 “한국의 제2외국어 교육은 입시와 무역 관계, 외교 논리에 지나치게 휘둘려 왔다”고 입을 모은다. 역사적으로 제2외국어 교육은 크게 △독·불어 2강 시대(1950~80년대), △독·불·중·일어 4강 시대(1990년대), △중·일어 2강 시대(2000년대 이후)로 나뉜다.

권오현 서울대 독어교육과 교수는 “해방 후 일본과는 단교, 중국과는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독일어, 프랑스어 중심으로 제2외국어 교육이 시작됐다. 1960~70년대엔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독일이 한국에 경제 지원을 많이 하고, 파독 광부·간호사로 인해 독일어가 인기였다. 이후 1990년대 들어 일본 문화 개방과 중국 수교를 계기로 일어·중국어 수업 개설이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이 기간 ‘제2외국어 교과목 선택 학생 비율’(한국교육개발원 통계)을 보면, 1991년엔 독일어(43%)와 프랑스어(24%)가 67%였지만, 2008년엔 일본어(63%)와 중국어(26%)가 89%로 선호도가 완전히 역전됐다.

이후 일본어·중국어 쏠림은 점점 강해졌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2020학년도 기준, 서울시 전체 고등학교 중 80.9%가 일본어, 77.2%가 중국어 수업을 편성했다(중복 개설 포함). 이화여고 이선영 교사(한국독일어교사회 부회장)는 “2000년대 초반 중국어·일본어 교사가 부족해 독일어·프랑스어 교사 중 희망자에게 1년간 서울대에서 ‘교사 연수’ 기회를 주고 자격증을 발급했다. ‘제2외국어계의 산업혁명’이었다. 전국 독일어 교사 수(전임 기준)가 1999년 1200명에서 2020년 23명으로 급감했다. 현재 서울 공립고 중 독일어 전임 교사가 있는 곳은 실질적으로 한 군데도 없다”고 했다. 서울 청담고 김민자 교사(일본어)는 “중학교의 경우 15년 전쯤 서울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어 붐이 불었다가, 이후 중국어 붐이 불었다. 최근엔 제2외국어 대신 ‘코딩’을 가르치는 학교가 많다”며 “우리 외국어 교육은 시류에 너무 휩쓸린다”고 했다.

◇절대평가에 고교학점제까지

임승규 수원 유신고 교감(중국어)은 “제2외국어 위상이 급격히 떨어진 변곡점은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서 ‘선택’ 과목이 된 데 이어, 2009년 개정에서 ‘외국어’가 아닌 ‘생활·교양 영역’으로 포함되면서부터”라며 “전 세계적으로 다양성, 다문화 수용을 점점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추세인데 우리 교육은 역행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올 수능부터 제2외국어가 ‘절대평가’로 바뀌면서 지원 학생 수가 급감한 데다, ‘고교학점제’(학생들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듣는 제도)가 2023년부터 시행되면 제2외국어 기피 현상은 더 심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2학년 김모(17)군은 “제2외국어는 다른 과목에 비해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하는데 필수가 아니다 보니 굳이 선택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했다.

김민자 교사는 “올 입시에서 전국 200여 4년제 대학 중 서울대만 유일하게 수시 전형 지역균형에 지원하는 문과생과 정시 모집에서 일부 문과에 제2외국어를 필수 응시 영역으로 지정하고 있다. 겨우 제2외국어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며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자면서 외국어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했다.

기형적인 외국어 교육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수년간 이어진 ‘아랍어 로또’ 현상이다. 아랍어가 정식 개설된 학교는 전국에 울산외고, 일산 저동고, 고양국제고, 광주광역시 광덕고 등 4~5곳. 2018년부터 서울 경기고가 ‘온라인 거점학교’로 아랍어 수업을 운영하고 있지만 수강 학생은 여섯 명밖에 없다. 그마저도 경기고 재학생은 한 명도 없다. 그런데도, 해마다 수능에서 평균 점수가 워낙 낮아 ‘대충 찍어도 3~4등급은 받을 수 있다’며 아랍어에 몰렸다. 올해는 절대평가로 바뀌면서 지원자가 1만5724명(25.68%)으로 지난해(5만2443명, 67.95%)에 비해 급감했지만, 여전히 제2외국어 중 지원자가 가장 많다.

/자료=한국교육과정 평가원

◇글로벌 인재 강조하면서 외국어 교육은 축소

2022학년도 중등교원(중·고교 교사) 선발 예정 공고를 보면, 중국어 교사는 1997년 첫 선발 이후 24년 만에 한 명도 뽑지 않는 반면 독일어, 프랑스어 교사는 수십 년 만에 충원한다. 교육부 관계자는 “중국어 교사는 매년 뽑아와 수요 대비 충분한 상태라 올해는 뽑지 않기로 했지만, 독일어·프랑스어는 학생 수요 대비 부족해 10여 년 만에 선발하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 중국어 교사는 “당장 주한중국대사관에서 중국어 교사를 안 뽑는다는 소식이 맞는지 확인한 것으로 안다. 최근의 한중 관계 악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적 고려보다도 ‘점수’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선영 교사는 “모든 길은 ‘입시’로 통하고, 학생들을 움직이는 건 오로지 ‘점수’”라며 “중국어는 어렸을 때부터 배운 학생이 많아 처음 하면 내신 따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 요즘 들어 중국어 대신 프랑스어, 독일어로 몰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서울시 내 모 고등학교 제2외국어 교사는 “얼마 전 고3 학생들을 데리고 단체로 백신 접종을 갔는데 대기 중에도 수학 문제집을 풀더라. 이런 아이들에게 제2외국어가 귀에 들어오겠나 싶더라”며 우리 공교육의 불균형을 꼬집었다.

근본적 문제는 지나친 영어 일변도 외국어 교육이란 지적도 있다. 제2외국어 전공 교수와 교사들의 모임인 ‘외국어 교육 정상화 추진연합’ 정형 대표(단국대 일문과 교수)는 “외국어 학습은 말을 통해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는 것”이라며 “한류 덕에 해외에서 한국어 인기가 높지만 일방적 한류는 한계에 직면할 수 있다. 균형 있는 외국어 교육으로 타 문화를 포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