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짓단 아래, 언제나 보일락말락 한 곳에 존재감 없이 자리했던 양말이 쑥 올라왔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유행하는 ‘모내기 룩’이다. 레깅스 위에 양말을 신거나, 조거 팬츠(바지 밑단을 시보리 처리한 운동복) 위에 스포츠 양말을 끌어올려 신는 모습이 마치 모내기할 때와 비슷한 모습이라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모내기룩’의 핵심은 ‘양말’. 이뿐 아니다. 슬리퍼에 양말을 신거나, 샌들에 양말 신는 일도 많아졌다. 바짓단 아래 감추거나, 아예 보이지 않아야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패션의 ‘만년 조연’ 양말이 주연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명품은 못 사도, 양말은 산다
‘매일 아침 출근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양말만큼은 골라 신을 수 있다.’
제주 서귀포시 한 생활 소품 편집숍의 양말 판매대에 적힌 글귀다.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직장을 다니는 서모(35)씨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사람이다. 그는 매일 날씨와 기분에 따라 양말의 색깔과 무늬를 골라 신으며, 한 달에 2번 이상 새 양말을 산다. 서씨는 “2만원의 행복”이라고 했다. “양말은 일부 명품 브랜드를 제외하고는 정말 비싼 양말도 2만원을 넘지 않거든요. 그런데 비싼 옷을 살 때만큼이나 그 만족감은 커요. 회사가 보수적이라 옷은 개성을 살려 입을 수 없는데, 양말만큼은 제 맘대로 신는다는 자유도 있고요.”
패션계에 근무하는 이모(38)씨의 취미도 양말 구매다. 이씨는 “패션의 완성은 양말이라고 생각한다”며 “양말은 사람들이 잘 신경 쓰지 않는 작은 아이템이지만, 그렇기에 양말까지 신경 쓰는 사람을 보면 더더욱 센스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씨는 “명품은 못 사더라도 누구나 자신을 위해 양말 한 족은 투자할 수 있지 않느냐. 최근엔 바지 기장이 짧아지고, 유명 패션 브랜드들도 샌들에 양말을 매치하는 등의 시도가 많아지면서 양말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진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한 양말 정기 구독 서비스도 나왔다. 30년간 양말 공장을 운영했던 ‘미하이삭스’는 한 달에 6900원을 내면 매달 새 디자인의 양말을 집으로 배송해준다. 미하이삭스 관계자는 “스트리트 패션을 좋아하는지, 회사에서 신을 양말이 필요한지, 튀지 않는 양말이 좋은지 큰 카테고리만 고르면 매달 새 양말을 보내준다”며 “반응이 좋아 매해 구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원조 양말맨은 부시 전 대통령
해외 정치권에선 양말로 메시지를 전하거나, 이를 통해 인지도를 높인 경우가 많다.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은 원조 ‘양말맨’으로 꼽힌다. 그는 아내 바버라 여사의 장례식에는 바버라가 문맹 퇴치 운동에 힘쓴 것을 기려 알록달록한 색깔의 책이 그려진 양말을 신었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는 클린턴의 얼굴이 새겨진 양말을 신었다. 자신의 생 마지막에는 회색 바탕에 전투기가 여러 개 그려진 양말을 신고 떠났다. 2차 대전 당시 부시 전 대통령이 미 해군 조종사로 활약한 것에 대한 찬사라고 당시 대변인은 밝혔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 피용 전 총리가 빨간 양말 덕에 ‘패션 아이콘’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부인 김건희(50) 씨도 지난 4일 사전투표날에 빨간색 양말을 신고 나타나 눈길을 끌기도 했다.
패션 칼럼니스트 이헌씨는 “양말은 패션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반란’ 같은 것”이라며 “특히 한국 남자들의 경우 패션이 좀 보수적인 경우가 많은데, 그 안에서 용기를 내 멋을 부릴 수 있는 공간이 양말이다. 너무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으면서도, 은근슬쩍 패션 감각과 위트를 엿볼 수 있게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