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중순이었다. 오랫동안 같이 일해왔던 출판사 편집장님과 홍보팀장님께 도움을 청했다. 출연 섭외, 강연 요청, 광고 제안까지 매일 내게 연락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답하기가 힘들어서 그 일을 도와줄 대행사를 찾아달라고 했다. 5월에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를 통해 갑자기 내가 널리 알려진 모양이다. 5월 넷째 주 방송통신위원회 방송콘텐츠 가치정보분석시스템에 예능 출연자 언급량으로 13위까지 기록했다는 뉴스도 읽었다. 비슷한 경험이 많은 홍보팀장님은 곧 연락이 줄어들 거라고 말해줬다. 특히 내가 한국에 살고 있지 않아 요청을 거부할 수밖에 없으니, 관심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직후부터 연락이 정말 빠른 속도로 줄기 시작했다. 좀 올라가려고 했던 나의 자만심도 수그러지고 말았다.

일러스트=한상엽

그래도 이번 일을 통해 다시 연락하게 된 친구들도 있고, 오랜만에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 친구들도 있다. 의미 있는 인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연락을 받기도 했다. 내가 설립한 비영리 단체 ‘야나 미니스트리’에 후원하겠다는 사람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별 기기를 연구 제작하는 분들도 있었다. 내게 큰 희망을 준 분도 있었다. LG전자 고객가치혁신실에서 접근성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박세라님이었다. 그녀는 본인을 “전자 기기를 사용할 때, 촉각적인 보조 장치가 필요한 사용자를 위해서 점자 스티커 개발을 하거나, 음성 설명서를 개발하는 테크니컬 라이터”라고 소개했다.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고객 중에서 나이가 많거나 신체 활동이 어려운 분들을 불러 테스트하면서, 제품 사용에 불편함을 개선하는 업무를 하는 역할이라고 했다. 세라님의 연락을 내가 특별히 반가워했던 이유다.

시각장애인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스크린리더는 참 많은 이들의 삶을 바꾸었다. 스크린에 올라오는 정보를 말로 읽어주고, 점자로도 출력해주는 이 기술 덕분에 직장 생활이 가능해졌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필수인 스마트 기기 사용이 가능해져서, 장애가 가져다주는 불편이나 불공평함도 줄여준다.

하지만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제외하면 내가 혼자 사용할 수 있는 전자·전기 제품이 이젠 그리 많지 않다. 복잡해져 버린 리모컨, 화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질문지나 선택지 때문에 나는 텔레비전도 혼자 볼 수 없다. 사용법이 쓸데없이 복잡한 전자레인지를 혼자 사용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기능이 많아진 전기밥솥도 사용하기 힘들어졌다. 냉장고에 부착된 제빙기나 정수기도 쉽게 쓸 수 없다. 스스로 할 수 있었던 빨래조차 혼자서는 어렵다. 선택지가 많아 복잡해진 세탁기와 건조기 탓이다.

게다가 요즘은 터치스크린을 사용하는 도구들이 너무 많아졌다. 전에는 어떤 순서로 버튼을 몇 개 누르면 현금 자동 입출금기에서 돈이 나왔는데, 이젠 이것조차 내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자동 기차 티켓 판매기를 사용해야 할 때도, 심지어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터치스크린을 사용해야 할 경우가 있다. 결국 시각장애인들은 물론이고 노년층 소비자들까지도 독립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기억나는 기업이 있다. 애플!

애플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오랫동안 불만의 대상이었다. 스크린리더 개발을 제한 없이 모두에게 열어두었던 윈도 OS와는 달리, 애플은 스크린리더 개발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Outspoken’이라는 스크린리더를 사용해서 시각장애인이 매킨토시 컴퓨터를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여러 기업이 경쟁하며 개발하는 윈도 스크린리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능이 허술했다. 결국 시각장애인들은 애플이 개발하고 제작했던 매킨토시 컴퓨터들을 오랫동안 쓸 수 없었다. 마치 애플이라는 기업이 매킨토시를 시각장애인들이 아예 사용할 수 없도록 설계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2005년 소개된 ‘보이스오버’라는 스크린리더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매킨토시를 사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애플은 2009년과 2010년엔 각각 아이폰과 아이패드에도 보이스오버 기능을 추가했다. 놀라운 것은 1990년대 초부터 여러 기업이 개발해 온 윈도 스크린리더와는 매우 다른 스타일의 스크린리더를 애플이 개발했다는 사실이다. 복잡한 교육이나 긴 연습 없이도 터치스크린을 조작할 수 있어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대부분 시각장애인은 애플 스마트 기기를 쓴다. 보이스오버가 제공되지 않았더라면 현대인의 필수품인 스마트폰이 시각장애인들에겐 사용조차 힘들었을 수도 있다. 구글의 음성 안내 기능이 시각장애인에게는 좋은 스크린리더로서 안드로이드 기기 사용을 가능하게 해주기도 했다. 여기에도 애플의 보이스오버의 높은 질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스마트기기 사용을 가능하게 한 ‘큰일’을 애플이 시작했다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소비자 전자제품 디자인의 혁명은 한국 기업인 LG전자가 시작하길 희망해본다. 박세라님뿐만이 아니라, LG에 근무해 온 지인들에게서 LG의 기업 정체성에 대해 들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LG는 성장과 이윤만이 아니라 사회 문제나 이슈에도 신경을 쓰는 기업이라고 들었다. 특히 윌리엄 조 LG 전자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기업 철학을 강조했다고 한다. 시력이나 청각 등에 장애가 있는 이들을 위한 디자인 개선은, 가면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노년층 소비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더 살기 좋은 세상, 발전을 거듭하는 가전제품이 훨씬 더 많은 이들의 삶을 더 편리하게 하는 미래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