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피죤투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포켓몬 트레이너를 꿈꿨던 나는 별볼일없는 어른이 됐지만, 넌 챔피언이 됐구나. 수고 많았어, 지우야.”
지난 1월 ‘포켓몬스터’에서 하차하게 된 지우를 헌정하면서 만든 한 유튜브 영상엔 이런 유의 댓글 4300여 개가 달렸다. 1996년 닌텐도 게임에서 시작된 포켓몬스터는 일본에서 그 이듬해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방영됐다. 태초마을에 사는 열 살 지우가 피카츄란 가상의 생물과 함께 포켓몬 마스터가 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담았다.
피카츄나 꼬부기, 파이리 등 동물과 요괴를 섞은 듯한 생물이 ‘포켓몬스터’이며, 지우처럼 이들을 자신의 포켓몬으로 수집해 성장을 돕고 대결로 이끄는 사람이 ‘트레이너’다. 포켓몬과 트레이너가 한 팀이 돼 다른 트레이너와 대결을 펼치고, 여기서 최종적으로 이기는 사람이 마스터가 된다. 한국에선 1999년 처음 방영된 이후, 지금까지 세대를 거듭하며 사랑받았다.
그런 지우가 지난해 11월 25년 만에 마침내 포켓몬 배틀 최강자를 가리는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포켓몬스터를 떠나게 됐다. 포켓몬컴퍼니는 지난해 12월 공식 계정을 통해 “오는 4월 완전히 새로운 포켓몬 시리즈가 발표된다”며 “두 주인공과, 3마리의 포켓몬이 새로 공개된다”고 했다. 지난 1월부터는 지우의 지난 여정을 되돌아보고 마무리하는 성격의 특별편이 방영되고 있다.
◇26년 만에 새 주인공 등장
지난달 23일 일본 후쿠오카 포켓몬 센터엔 나오하, 뜨아거, 꾸왁스의 대형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들은 로이, 리코와 함께 새 시즌에 등장하는 포켓몬들이다.
포켓몬스터는 1996년 151마리의 1세대 포켓몬을 선보인 이래, 1~2년 주기로 신작을 내며 9세대까지 제각기 외형과 설정이 다른 1000마리 이상의 포켓몬을 출시했다. 그래도 항상 주인공은 지우와 피카츄였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지우와 피카츄가 최종 우승을 하며, 주인공 자리를 물려주게 됐다. 당시 이 우승 장면은 일본 도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시부야의 대형 전광판에 중계되기도 했다.
다만, 피카츄는 지우의 파트너가 아닌, ‘캡틴 피카츄’란 새 역할로 계속 나오게 될 예정이라고 포켓몬컴퍼니는 전했다.
6살 딸을 키우는 김혜윤(34)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포켓몬스터를 보고 포켓몬 빵을 사먹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 내 딸이 여전히 포켓몬스터를 보며 자라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김씨는 “지우와 피카츄가 마침내 우승을 하는 장면도 아이와 함께 봤다”며 “이제 지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더라. 나 역시 코끝이 찡해졌다”고 했다.
특히 MZ세대에게 지우는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우가 25년 만에 우승했다는 건, 25년간 실패했다는 것과 동의어다. 영국 BBC는 “포켓몬스터는 강하지 않아도, 계속 실패하더라도,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가치 있다는 걸 알려줬다”고 했다.
◇‘가와이 문화’ 정수 보여준다
포켓몬스터를 만든 타지리 사토시(58)는 어릴 때 별명이 ‘곤충박사(Dr. bug)’였다. 도쿄에서 태어난 사토시는 자연에 둘러싸인 마을에서 야산을 누비며 곤충 채집과 관찰을 즐겼다. 사토시는 과거 타임지와 인터뷰에서 “어릴 때 이 경험이 포켓몬스터를 만드는데 큰 영감을 줬다”며 “어느 순간 도시가 개발되면서 요즘 아이들은 더 이상 이런 경험을 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피카츄로 대표되는 포켓몬 캐릭터들은 ‘가와이(かわいい)’ 문화의 정수로도 꼽힌다. 외국에선 헬로키티 등 일본 캐릭터 특유의 아기자기한 귀여움을 ‘귀엽다’는 일본어 단어 원음을 그대로 따 ‘가와이’라고 부른다. 피카츄의 경우에도 만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그 색과 모양은 기억할 정도로, 단박에 눈을 사로잡는 외양을 지녔다. 크기는 작지만 파트너인 지우에게 끝까지 충성하며, 수많은 도전 앞에서 용감한 모습을 보여 감동을 준다.
이름이 쉽고 재미있으며, 각 나라에 맞게 현지화가 잘됐다는 것도 포켓몬스터의 강점으로 꼽힌다. 지우는 일본어로는 원작자의 이름을 딴 사토시지만, 한국에선 한지우, 영어권에선 애시(ash)다. ‘이상함’이란 일본어 후시기와 ‘씨앗’이란 뜻의 다네가 합쳐진 ‘후시기다네’는 한국에선 ‘이상해씨’, ‘소난데스(그렇습니다)’의 줄임말인 포켓몬 ‘소난스’는 한국에선 ‘마자용’이다.
피카츄만큼은 전 세계 모두 그대로 쓴다. 피카츄는 ‘번쩍’이란 일본어 ‘피카’와 쥐의 찍찍 소리인 ‘츄’가 합쳐진 말로, 누가 들어도 쉽게 각인되고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어디든 콜라와 피카츄가 있다
포켓몬스터는 전 세계 미디어 믹스(특정 지식재산권을 소설·영화·만화·게임 등 여러 미디어로 출시하는 것) 중 부동의 매출 1위이기도 하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인 스태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포켓몬스터는 1996년 게임 출시 이후 총 1050억달러(약 138조원·2021년 8월 기준)의 매출을 올렸다. 월트디즈니의 미키 마우스(803억달러), 산리오의 헬로키티(845억달러)를 훌쩍 뛰어넘는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콜라와 포켓몬스터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석기 시대처럼 사는 인도네시아의 한 고립된 마을에서도, 아이들은 포켓몬 티셔츠를 입고 있더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포켓몬스터는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장난감, 학용품, 서비스업 등 다방면으로 진출했다. 지난달 27일 막을 내린 잠실 롯데월드몰 ‘포켓몬 팝업스토어’에도 3일간 1만명이 모였다. 대기에만 3시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지난해 초 16년 만에 돌아온 ‘포켓몬빵’은 ‘편의점 오픈 런’ 사태를 낳기도 했다.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김치호 교수는 “마블 코믹스 같은 경우에도 만화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처음부터 참여하지 못했던 새 팬들이 유입될 수 있도록 새로운 주인공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변주를 줬다”며 “포켓몬스터도 그런 시도를 하는 듯하다”고 했다.
김 교수는 “과거 우리도 뽀로로 등 성공한 상품이 있지만, 세계적으로 장기간 흥행하는 콘텐츠가 되기엔 한계가 있었다”며 “여러 세대에서 사랑받는 장수 콘텐츠가 되기 위해선, 팬들이 다양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만화, 영화, 게임 등의 방식으로 세계관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팬층이 두터워지고, 캐릭터의 생명력이 높아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