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김 없는 신품입니다. 한창때 사서는 장지갑에 보관했습니다.”

짐바브웨산 100조 달러. '0'을 세는 것이 버거울 정도의 거액이다.

중고 거래 사이트 ‘중고나라’에 지난주 솔깃한 매물이 하나 올라왔다. 지폐였다. 그것도 100조짜리. 아프리카 빈국 짐바브웨에서 2009년 제작한 ‘100조달러’ 화폐다. 물가 상승률이 2억%나 되는 황당한 인플레이션 탓에 황급히 찍어낸 비운의 통화, 그러나 달걀 몇 개밖에 살 수 없던 허접한 종잇장.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현재 우리나라 돈으로 10만원대 중반에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고나라에만 판매 글이 10여 건 올라와 있고, 중고가(價)는 매해 상승세다. 신권 100장을 묶은 ‘다발’도 지난달 매물로 나오자마자 다 팔렸다. 대체 왜?

◇초고액 지폐, 행운의 상징?

'중고나라'에 매물로 나온 짐바브웨 100조 달러 지폐. 판매자는 '행운의 상징'으로 소개했다. /중고나라

“현재는 단종된 화폐로 통용되지는 않지만 ‘행운의 100조달러’로 불리고 있습니다. 간직하시어 항상 행운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한 중고 판매자는 이런 문구를 인쇄한 선물용 봉투까지 포함해 며칠 전 매물로 내놨다. 지난달 다른 판매자도 “몇 해 전에 돈 많이 벌라고 선물받은 것”이라며 무려 판매가 22만원을 책정했다. 실제 가치야 어찌 됐건 일단 지폐에 찍힌 ‘0′이 무려 14개니까. 액면가만 봐도 속이 든든하고 어쩐지 부자가 된 느낌을 주니까. 그 재미가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금박으로 제작한 장식용 ‘100조달러’도 판매되고 있다. “매장 계산대나 선반에 비치해 두기 좋다”며 인테리어 상품으로 파는 업체도 있다. 한 보험 설계사는 “새로 사업을 시작하거나 갓 취직한 고객들께 선물로 드리곤 했는데 반응이 좋았다”면서 “아무래도 초고액이 부(富)를 연상케 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진폐 ‘100조달러’의 크기는 우리나라 1만원권, 색상은 1000원권과 비슷하다. 화폐 앞면에는 짐바브웨 전역에서 발견되는 3층짜리 ‘균형 바위’가 그려져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시세 차익을 목적으로 교묘히 제작한 위폐까지 돌아다닌다.

◇쓸모없는 종이… 값은 계속 올라

금박을 입힌 선물용 짐바브웨 100조 달러. 매장 인테리어 등에도 사용된다고 한다. /네이버스토어

시인 김광균은 낙엽을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로 묘사하며 몰락의 씁쓸함을 노래했지만, 자본주의는 돈만 되면 그 낙엽마저 거래한다. 액면가에 비해 휴지 조각에 가까웠던 짐바브웨 ‘100조달러’는 초기만 해도 값어치가 우리 돈 4000원 수준에 불과했다. 2013년에도 수집가들은 비슷한 가격에 사고팔았다. 찾는 사람이 늘자 슬슬 시동이 걸렸다. 2019년에는 대략 8만원 선에 거래됐고, 2024년 현재 개인 거래로는 10만원 중반, 전문 취급 업체에서는 24만원까지 치솟았다. 15년 새 값이 50배 넘게 뛴 것이다.

한 수집가는 블로그에 “50조 짐바브웨 달러를 처음 구입할 때 장당 500원이었으니 다발 가격이 5만원밖에 안 했는데 지금은 거의 700만~800만원에 육박하니 많이 올랐다”며 “화폐 수집이나 가상 화폐 투자나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고 했다. 이윤을 향한 욕망이 무가치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화폐연구팀 측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숫자의 지폐는 우리 흥미를 돋우지만 그 이면을 살피면 경제 몰락과 극심한 물가 상승이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씁쓸한 돈의 역사

현재 글로벌 중고 거래 사이트 이베이에 올라와있는 옛 유고슬라비아 5000억 디나르 지폐. /이베이

짐바브웨뿐이 아니다. 글로벌 중고 거래 사이트 이베이에서는 유고슬라비아에서 1993년 발행한 ‘5000억디나르’를 구매할 수 있다. 우리 돈으로 장당 약 1만3000원. 독일에서 1924년 발행한 ‘100조마르크’, 헝가리에서 1946년 찍어낸 상상 초월 ‘1해(垓)’짜리 펭괴(Pengo) 지폐도 있다. 장작 대신 지폐를 태우던 시절이다. 전쟁 등으로 인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산물, 그러니 이것은 행운의 부적이라기보다 타산지석(他山之石)에 가까울 것이다.

물가가 잡히지 않자 짐바브웨 ‘100조달러’는 한 달도 안 돼 유통이 멈췄고, 정부는 그해 자국 화폐를 폐지했다. 잇따른 실정(失政)과 환율 불안정으로 실물 자산인 ‘금’으로 화폐 가치를 보증하는 방안까지 고려 중인 상황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진은 지난해 157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간 ‘고통 지수’를 발표했다. 고통 점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짐바브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