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에 일본 여행 가자는 와이프한테 ‘개념 없다’고 한마디 했더니, 도리어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네요. 제가 그렇게 못 할 말 한 건가요?”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을 뜻하는 국경일 중 3·1절은 한 해 가장 먼저 맞는 국경일이자 법정 공휴일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린 3·1운동을 기념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근 몇 년 사이 해마다 3·1절이 다가오면 “3·1절에 일본 여행을 가는 게 적절한 행동이냐”를 두고 가정, 회사 곳곳에서 찬반 논쟁이 벌어진다. 올해는 3·1절이 금요일이라 황금연휴가 성사되자, 일본 여행 인파가 다시 급증세를 보이면서 이 논란이 더 뜨거워졌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기준 대부분의 항공사 일본행 여객편의 예약률이 85~90%를 상회했다. 3·1절 연휴 일본행 항공편이 사실상 동난 것. 항공업계 관계자는 “요즘엔 3·1절이라고 일본에 안 가는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며 “황금연휴라고 해도 사흘로 짧다 보니 가까운 일본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3·1절 연휴에 일본 여행 붐이 인다는 소식에 온·오프라인 곳곳에선 “바람직하지 않다”는 쪽과 “별 상관 없다”는 쪽이 팽팽히 맞선다. 서울에 사는 30대 직장인 A씨는 “친하게 지내는 회사 후배가 이번 연휴에 일본으로 여행 간다는 말을 듣고 겉으론 ‘잘 다녀오라’ 했지만 속으론 정이 뚝 떨어졌다”며 “아무리 법정 공휴일이라도 3·1절에 일본 여행은 국경일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무개념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반론도 만만찮다. 부산에 사는 30대 직장인 B씨는 “그렇게 엄격하게 국경일 의미를 따진다면, 일본 여행이 아니라 국경일에 나들이 가고 희희낙락 떠들고 노는 것도 개념 없는 행동 아닌가”라며 “순국선열이 독립해서 세우려고 한 나라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인데, 국경일에 일본에 여행 가는 걸로 비난하는 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과도한 엄숙주의”라고 말했다.
‘아무튼, 주말’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3·1절을 앞둔 지난달 26~27일 20~60대 남녀 1500명에게 물었다. “3·1절이나 광복절에 일본 여행 가면 무개념인 건가요?”
응답자의 63%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했다. 여성이 65%, 남성은 59%였다. “국경일과 일본 여행은 별 상관이 없다”는 답변은 37%. 양쪽이 약 6대4로 갈렸다. 기존에는 “MZ세대일수록 국경일과 무관하게 행동한다”는 분석이 있었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세대별 격차는 거의 없었다. 도리어 “일본 여행과 3·1절은 별 상관 없다”는 답변이 60대에서 40%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어떻게 봐야 할까. 노정태 평론가는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까지는 국가적으로 교육받은 반일주의 말고도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더 잘산다’는 공포감에 기반한 반일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반면 그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는 국가적 반일주의에 더해 ‘우리가 일본보다 못하지 않은데’라는, 일본을 우리와 비슷하거나 얕잡아보는 공격적 반일주의를 보인다는 게 차이점”이라고 분석했다.
3·1절에 일본 여행을 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다른 곳에 갈 수 있는데 굳이 일본에 가는 건 국경일 취지에 벗어난다”는 답변이 45%로 가장 많았다. 이어 “순국선열을 생각하면 염치없는 행동”(35%), “일본에 관광 가서 돈을 쓰는 게 일본을 돕는 것이니 바람직하지 않다”(20%) 등이었다.
반대로 일본 여행을 가도 상관없다는 쪽에 이유를 묻자 54%가 “여행을 어디로 가든 개인의 자유”라고 답했다. 특히 20대와 60대가 각각 61%, 60%로 전체 평균보다 높았다. 이어 “어떤 장소에서든 국경일의 의미를 새길 수 있다”(30%), “일본 여행만 비난하는 건 시대착오”(16%) 등으로 나타났다.
이런 논란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선 “개인의 자유이니 그냥 둬야 한다”는 답변과 “정부의 홍보와 정책이 필요하다”는 답변이 각각 35%로 팽팽했다. “시민들이 나서 국경일 취지를 훼손하는 것을 비판하고 막아야 한다”가 20%, “국경일 취지가 무색해진다면 휴무를 없애야 한다”가 11%를 차지했다.
노정태 평론가는 이 논란에 대해 “국경일에 사이렌을 울리던 국가주의적 국경일 문화가 사라진 이후 ‘공휴일’만 덩그러니 남았기 때문”이라며 “특정 나라에 가면 된다, 안 된다는 소모적 논쟁보다는 국경일을 어떻게 기념하고 보낼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담론과 문화를 형성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