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라프로익 증류소 가마에서 피트를 태우고 있는 모습. /김지호 기자

술을 입에도 안 대는 A씨가 갑자기 피트 위스키를 샀다. 평소 그가 알고 있던 위스키 브랜드는 야마자키와 히비키 정도. 그마저도 어깨너머로 들은 정보뿐이다.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재패니스와 피트라는 단어에 의존한 채 덜컥 10만원이 넘는 술을 산 것.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사연은 이렇다.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A씨가 위스키 몇 가지를 만났다. 그날 준비된 술은 모두 6종류. 고숙성 셰리 위스키부터 60도에 육박하는 버번과 피트 제품까지. 팔짱만 낀 채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던 A씨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는 향이라도 맡아보자는 생각으로 각기 다른 위스키가 담긴 잔에 순차적으로 코를 댔다.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던 그가 피트 위스키에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술에서 장작 태운 풍미가 느껴질 수 있지?” 결국 한 모금 입에 머금은 A씨는 이튿날 피트 위스키를 사러 갔다.

피트(peat·이탄)란 ‘석탄화’되지 못한 습지에 축적된 퇴적물을 말한다. 나무뿌리, 풀, 이끼 같은 식물 잔해 등이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점토나 진흙 형태다. 이러한 습지를 피트랜드(이탄습지)라 부른다. 피트랜드는 춥고 습한 지역에 나타나는 생태계로 영국, 캐나다, 미국 중북부 지방 등에 분포하고 있다. 추운 지역이다 보니 유기물 분해 속도가 느려 땅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특성을 가진 지역이다. 스카치의 성지, 스코틀랜드의 약 170만 헥타르가 이탄습지다. 그중 약 4%가 위스키 산업에 사용된다고 한다.

위스키 제조는 몰팅(malting)→매싱(mashing)→발효(fermentation)→증류(distillation)→숙성(maturation) 과정을 거친다. 피트는 몰팅 단계에서 쓰인다. 피트를 태워 발아된 보리를 건조, 훈연해 ‘페놀’이라는 화합물을 주입하는 작업이다. 바닥에 보리를 깔고 아래층 가마에서 피트를 태워 그 연기로 보리를 말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피트 위스키 특유의 요오드, 타르, 타고 남은 재 같은 독특한 풍미가 입혀진다. 피트를 채취한 지역별로 그 풍미도 조금씩 다르다. 아일러섬에서 나는 피트는 바다의 영향으로 짭조름한 해조류나 정로환 같은 특징이 있다. 육지나 황무지에서 나는 피트는 야생화인 헤더꽃 등의 풍미가 묻어나 꿀 같은 느낌이 난다. 피트라고 다 같은 맛이 아니다.

위스키 숙성 연수가 낮을수록 피트의 풍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열정이 넘치는 구간이다. 반대로 숙성 연수가 높아질수록 피트의 성격은 온순해진다. 젊었을 때의 뾰족하던 성격이 시간이 지날수록 둥글게 깎이는 것. 대신 부드럽고 깊이 있는 피트의 풍미가 느껴진다. 뭐가 더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하면 된다.

피트 위스키를 처음 접한 사람에게 중간값은 없다. 피트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두 부류로 나뉜다. A씨에게 피트는 사랑이었다. 단 한 번도 술이 맛있다고 느낀 적 없던 사람의 입맛을 피트가 사로잡은 셈이다. 그날 저녁, 그가 맛본 술은 라프로익, 쿨일라 그리고 보모어 증류소의 위스키였다. 셋 다 피트의 성지, 아일러섬에서 탄생한 제품들. 어쩌면 당신도 피트를 좋아하게 될지 모른다. 그저 향만이라도 맡아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