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정신적 고통과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야말로 난세다. 한 친구는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며 시국의 괴로움을 호소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학생 시절 만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를 나이 들어 읽으니 새삼 절절하다. 난세의 철학인 ‘명상록’은 시간이 쌓여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폭군들이 일으킨 환란은 인간 욕망의 지옥도를 극사실주의로 보여준다. 권력의 절대반지를 낀 채 파멸해 버린 황제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제국을 파괴하기 전에 스스로의 영혼을 먼저 파괴한다.

아우렐리우스는 달랐다. 권력의 악마성을 넘어선 황제였다. 지상 최강의 자리도 그의 평정심을 흔들진 못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인 사생관과 세계시민주의를 실천했다. ‘명상록’은 호화로운 궁중이 아니라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최전선 진중에서 서술됐다. 아우렐리우스가 병사했을 때 로마 전군(全軍)이 통곡할 정도로 헌신적인 삶이었다.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노예 에픽테토스(55년쯤~135년쯤)를 깊이 존경했다. 나중에 해방 노예가 된 에픽테토스는 자신이 노예였다는 사실을 화두 삼는다. 우리는 돈과 권력 같은 외부 대상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지만 내적인 욕망과 정념은 다스릴 수 있다. 내면의 자유와 자율에 집중해야 할 이유다. 에픽테토스 ‘담화록’ 주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몸이 원소로 해체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세상 모든 것은 손상되고 소멸하므로 ‘천지는 불인(不仁)’하다. 내 능력 밖 세상사에 번뇌하기보다 내가 가꿀 수 있는 내적 자유와 평정심에 집중해야 한다.

스토아 철학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조잡한 ‘정신 승리’도 아니다. 인간의 궁극적 바탕은 치열한 자기 선택과 노력의 결정체라는 삶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이다. 욕망으로 질주한 황제가 파멸하고 절제하는 노예가 자유인으로 상승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논문 글쓰기로 왜소화한 강단 철학은 절박한 삶의 문제들에서 멀어졌다. 스토아 철학은 이런 공백을 메워 세상 풍파에 맞설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을 키워준다. 방황하는 인간의 절규에 응답하는 삶의 철학이다.

하지만 세상이 지금처럼 소란해지면 권력을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사람들의 광무(狂舞)가 펼쳐진다. 불타는 그 욕망이 결국 자신을 태워버릴 게 분명한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멀쩡해 보였던 사람이 작은 권력에 도취해 표변하곤 한다.

열기에 들뜬 군중이 한 사회를 휩쓸고 갈 땐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모든 권력에서 성찰적 거리를 유지하는 마음의 습관이 중요하다. ‘명상록’ 원제는 ‘자기 자신에게 전하는(Ta eis heauton)’이라는 뜻이다. 난세일수록 스스로에게 집중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위태로운 건 없다.

거실 앞 소나무에 까치 한 쌍이 한 땀 한 땀 까치집을 쌓고 있다. 강추위와 폭설도 이겨내는 꾸준함이다.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이 평온해지고 삶이 정돈된다. 세상이 아무리 어지러워도 우리에겐 묵묵히 해 나가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건강한 일상의 힘이 모여 세계의 붕괴를 막아준다.

가끔은 스스로 되묻는다. 내가 진정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를 다잡아 줄 마음의 중심은 있는가? 이런 질문의 시간을 쌓아야 비로소 ‘잘’ 살아갈 수 있다. 그게 바로 좋은 삶이다. 구원은 구체적 일상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