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무한 남독에 빠진 청년 시절 난 에리히 프롬(1900~1980)을 사랑했다. 그의 책을 ‘모조리’ 읽으려 했고 그게 영어 공부에도 도움이 됐다.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한 유대계 독일인 프롬의 영어는 쉽고 풍성하다.

프롬의 사회심리학은 내게 큰 실존적 영향을 주었다. 나 자신을 긍정하면서 자유롭게 홀로 설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길러 주었다. 프롬 저작은 시중에서도 꾸준히 읽힌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대표적이다. 1941년에 나온 책인데도 오늘의 현실을 조망하는 힘이 있다.

‘12·3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대혼돈 상태다. 정치가 무너지고 가짜 뉴스가 난무하며 상식이 흔들린다. 온 나라가 쪼개져 다툰다. 적대적인 두 진영으로 대치한 군중이 떼의 위력을 과시하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군중심리의 위험성을 경고한 프롬의 통찰이 새삼 뼈를 때린다. 현대인은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자유엔 불안과 고독이 따라온다. 생활의 무게에 짓눌리고 불안과 고립감에 시달리는 군중은 누군가가 자신을 구원해 주길 갈망한다. 정의로운 미래를 약속한 권위주의적 지도자에게 대중이 환호하는 이유다. 그게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다.

현대인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자발적’이다. 대중은 ‘진심으로’ 지도자를 사랑한다. 군중은 자신들이 경애하는 지도자를 사악한 적들이 해치려 한다며 분노한다. 같은 생각을 가진 무리 안에서 대중의 불안과 무력감은 씻은 듯이 사라진다. 열정으로 벅차오른 군중이 정의를 외치면서 거리를 질주한다.

대중민주주의의 시민이 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진영 간 증오가 폭발하면 맹목적 군중심리에 휩쓸릴 가능성도 커진다. 광장의 군중에게 ‘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자기편 신념이 먼저다. 무리가 늘어날수록 정치 효능감도 확장된다. 주관적 믿음을 진리로 맹신하는 군중에게 다른 목소리는 적이자 악일 뿐이다.

군중심리의 열병이 사회를 휩쓸면 ‘다중의 전제(專制)’에 질린 이성과 상식의 목소리는 침묵하게 된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윽박지르는 대중 앞에서 언론과 지식인도 자기 검열에 빠진다. 군중을 업은 정치권력이 폭주하기 시작한다. 파시즘의 출발이다.

파시스트들은 대중의 열광적 지지에 힘입어 민주적 수단으로 권력을 잡는다. 가상 적을 만들어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스스로 사유하지 않고 가짜 뉴스와 선동에 휘말리는 군중이 파시즘을 불러온다는 사실이다. 이게 제3제국 독일 대중이 ‘퓌러’(Führer·총통)를 맹종한 이유다. 대재앙의 시작이었다.

남의 나라, 과거 얘기가 아니다. 떼로 몰려다니는 군중이 분노와 혼란을 부추길 때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자유인이 되기보다 힘겨운 일도 없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대중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파시즘의 독버섯이 K 르네상스의 성취를 무너트리려 한다.

청년 시절 난 프롬과 비판적으로 만남으로써 조금은 더 독립적인 사람이 되었다. 인간은 충실한 일상과 사랑의 힘으로 존재의 허망에 맞서야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을 견뎌내는 내적 힘을 길러야 한다. 다른 이들과 대화하며 동행하되 궁극적으론 홀로 걷는 게 우리네 삶이다.

대중사회에서 어떻게 자유인으로 살 것인지 하는 고민은 대학 잡지에 실린 ‘인간소외론 연구’라는 학부 졸업논문으로 남았다. 누렇게 바랜 그 잡지는 지금도 서재 구석에서 격려의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청춘의 훈장으로 새겨진 독립적 자유 시민의 길이다. 어지러운 시대가 ‘너는 어느 편이냐?’라며 다그친다. 시대의 광풍에 맞서 홀로 설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진정한 자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