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을사년을 맞아서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각종 매체에 오르내린다. 대한제국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1905년 을사조약이 이 표현의 어원이라는 말은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을씨년’은 을사조약보다 훨씬 전부터 사용돼 왔던 표현이다. 사진은 을사조약 현장인 서울 중명전 1층에 재현된 협상 장면. /박종인 기자

을사조약과 을씨년스럽다

해마다 연말 연초가 되면 신문과 방송은 12간지와 60갑자를 인용해 많은 기사와 칼럼을 쏟아낸다. 을사년인 2025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올해 여러 매체 신년 칼럼이나 방송에서 똑같이 보이는 표현이 있다. 바로 ‘을씨년스럽다’다. 이 표현이 바로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넘긴 1905년 을사조약에서 시작됐다고들 말한다. 예컨대 이러하다.

‘‘을씨년스럽다’란 말은 아픈 역사의 상징이다. ‘을씨년스럽다’는 을사년(乙巳年)에서 비롯됐다.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사전’(이재운 편저)은 “을씨년은 1905년 을사년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을사조약으로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당시, 온 나라가 침통하고 비장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로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다”고 설명한다.’(2025년 2월 7일 ‘매일신문’)

‘사람들은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어원이 1905년 을사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을까? 날씨나 분위기가 쓸쓸하고 스산할 때 쓰는 을씨년스럽다는 ‘을사년스럽다’가 변한 말로, 일본이 강압적으로 조선과 ‘을사늑약’을 맺은 1905년부터 사용한 단어다. 그 이후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느낌이 들 때면 을사년 당시의 기분이 든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단어가 생기게 됐다.’(2025년 2월 3일 ‘무등일보’)

‘‘을씨년스럽다’는 “보기에 날씨나 분위기 따위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는 뜻이라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설명한다. 이 말은 1905년 을사늑약의 비통한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했다. 단어 하나에 깃든 역사의 무게를 떠올리면 그 스산함이 더 깊게 다가온다.’(2024년 1월 24일 ‘한겨레21′)

‘1905년에 일제가 이완용 등 친일 고관들을 앞세워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사늑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120년 전의 을사년은 우리나라 민중에게 치욕스러운 해였다. 여기에 뱀의 음흉한 인식이 결합하면서 ‘을사년→을시년→을씨년’으로 변한 말이 ‘을씨년스럽다’다.’(2025년 1월 26일 ‘경향신문’)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똑같은 주장을 한다. 실제로 대다수 사람이 이 말에 동의하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정말일까? 정말 이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1905년 을사년에 체결된 을사조약, 을사늑약, 2차 한일협약에서 비롯된 표현일까?

그럴듯하고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이 상식, 틀렸다. ‘을씨년스럽다’는 을사조약과 무관하다. 이 말은 1905년 훨씬 전부터 사전에 실릴 정도로 흔하게 사용되던 표현이다.

‘을씨년스럽다’의 뜻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을씨년스럽다’는 첫째, 날씨나 분위기 따위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 둘째, 살림이 매우 가난한 데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딘가 부실하고 궁벽하게 보이면 이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을 가져다 쓴다.

1920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어사전’ 669페이지에 ‘을시년스럽다’라는 항목이 있다. 그 뜻을 ‘적막하다’로 풀이하고 있다. 식민 시대 나온 신문들이나 소설들에도 ‘을사년스럽다’ ‘을쓰년스럽다’ ‘을쓴연스럽다’ 같은 표현이 숱하게 등장한다. 뜻은 ‘조선어사전’ 풀이와 비슷하다.

1920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어사전’에도 등재될 만큼 ‘을씨년스럽다’는 한일관계와 무관한 표현이었다./국립중앙도서관

일단 의심이 간다. 조선을 실질적으로 식민지로 만든 해를 빗댄 부정적인 표현을 총독부가 사전 풀이를 해놓은 사실도 의심이 가고 조선인들이 마음대로 그 표현을 사용하도록 놔둔 것도 의심이 간다. 식민 시대를 실질적으로 공개 선언한 을사조약이 이 단어 어원이라면 총독부가 굳이 자체 편찬한 사전에 올리기는 껄끄럽지 않았을까.

아무도 몰랐던 ‘을씨년’의 뜻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1905년 을사조약과 관련 있다는 주장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근대 신문을 모아놓은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검색하면 해방 후 1990년대 이전에도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 어떤 글에서도 이를 ‘1905년 을사조약’과 연관 짓지 않았다. 그저 흉흉하고 스산한 상황을 을씨년스럽다고 묘사했을 뿐이다.

확인할 수 있는 학문적 성과 가운데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을 을사조약과 연관 지은 첫 번째 해석은 1989년 중국 연변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에서 펴낸 단행본 ‘어원사전’이다.

‘을사년은 일제가 리조봉건 통치배들을 위협 공갈하여 한일협상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한 해이다. 참으로 을사년은 조선 인민에게 있어서 가장 치욕스럽고 저주로운 해였다. 여기로부터 마음이나 날씨 같은 것이 어수선하고 흐린 기운을 나타내는 것을 을씨년스럽다고 하는데 이것은 을사년스럽다는 말이 변한 것이다.’(안옥규, ‘어원사전’,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89)

1989년 중국 연변에서 이 같은 해석이 처음 등장한 이후 대한민국 국내에서도 이 해석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어떤 학자도 주장만 했을 뿐 1905년 을사년에서 유래했다는 근거는 내놓지 못했다.

1994년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500가지’(박숙희, 서운관, 1994)라는 책이 출간됐다. 여기에 드디어 ‘을씨년은 일제에 외교권이 박탈됐던 을사년을 뜻한다’는 주장이 학문을 벗어나 대중적으로 공식 선언됐다. 학자들 사이에서만 논의되던 어원 주장을 일반 대중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9년 뒤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이라는 유사한 제목을 가진 또 다른 책이 출판됐다. 이 책 또한 을씨년이 1905년 을사년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책이라는 것은 한번 출판되고 인기를 끌면 수정하기가 힘들다. 이후 을씨년은 1905년 을사년이라는 말이 사실로 확정됐다.

이 뜻이 대중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언론 매체는 20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100주년의 대한민국’이라는 ‘동아일보’ 사설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주장이 아니라 진실로 굳어져서 인용하고 있는 중이다. 2018년에는 라디오 ‘교통방송’에서 “1905년 이전 문서에는 어떤 문학이나 다른 문서에서 이런 낱말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거의 확실하게 그때 1905년에 생겼다고 할 수 있다”고 출연자가 확언하기까지 한다. 진짜일까? 가짜다.

전혀 근거가 없다.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은 일반 대중이 모를 뿐, 충북대 조항범 명예교수가 이미 11년 전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에 대하여’(’한국어학’64, 한국어학회, 2014)라는 논문에서 소상하게 밝혀놓았다. 이 글은 전적으로 조항범 교수의 논문을 참고한 것이다.

1897년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편찬한 ‘한영자전’ 표지./국립중앙도서관

을씨년의 진실

제임스 게일이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만든 ‘한영자전(韓英字典)’이라는 사전이 있다. 조선인 선교를 위해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출판한 이 사전에는 ‘을사(乙巳)’라는 항목이 있다.

‘乙 새 巳 배암(뱀) 60갑자의 42번째 해 1845; 1905; 1965. 기근이 난 해(1785) - 지금은 가난과 고통 등을 뜻하는 표현.’(The 42nd year of the cycle 1845; 1905; 1965. A year of famine(1785) - used now as an expression for poverty, suffering etc)

1897년 한영자전 을사년 부분. 가난과 고통을 뜻하는 표현이라고 설명돼 있고 1785년 기근을 뜻한다는 설명도 붙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이 사전이 출판된 해는 1897년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보다 8년 전이다. 게일이 활동하던 1897년에 이미 조선인들은 을사년을 고통과 가난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은 식민 시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앞에서 봤듯, 식민 시대와 이 표현을 연관 지은 해석은 1980년대 후반에야 나타났다. 그것도 시작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중국 연변이었고 내용은 극단적일 정도로 전투적이었다. 이 해석이 21세기까지 반성 없이 유통되면서 지금 ‘을씨년스럽다’고 하면 을사조약을 떠올리고 황량한 식민시대를 떠올리는 이야기를 한다. 조금 배웠다는 지식인들도 어김없다.

진짜 을사년은 1785년

그렇다면 진짜 을씨년스러웠던 을사년은 언제일까? 게일의 한영자전을 보면 ‘A year of famine(1785)’이라고 적혀 있다. ‘기근이 든 해 1785년’이라는 뜻이다. 1785년은 정조 시대다. 실록에 따르면 한 해 전인 1784년 정조가 이렇게 하교한다.

‘기근이 거듭 들고 지진이 일어 창고가 텅텅 비었다. 구휼을 하려면 백성이 오히려 힘들고 환곡에 의지하려 하면 또 백성이 해를 받으니 난감하다. 작년과 올해 기근이 거듭 들었으나 집집마다 넉넉하게 지급하지 못하였다.’(1784년 2월 7일, 3월 15일, 3월 18일 ‘정조실록’)

2년째 흉년이 심각했지만 구휼미를 받은 백성이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구휼미 지급이 사라진 을사년 1785년에도 가뭄이 가져다준 피해가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670~1671년 경술대기근처럼 정부 차원 구휼이 불가능했던 기근이 이 해 전후로 벌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전을 편찬한 게일은 이 1785년을 특정해 ‘을사’라는 항목을 만들어놓고 ‘기근이 벌어진 해 1785년’이라고 부기해 놓았다. ‘가난’과 ‘고통’이라는 사전적 의미와도 상통한다.

'송남잡지'(1855) 표지. /국립중앙도서관

을씨년스럽던 세도정치와 ‘송남잡지’

‘송남잡지(松南雜識)’라는 문헌이 있다. 조재삼(趙在三)이라는 충북 괴산 선비가 쓴 백과사전이다. 조재삼은 서문에 집필 날짜를 ‘을묘(乙卯) 8월’이라고 적어놨다. 조재삼은 1808년에 태어나 1866년에 죽은 인물이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을묘년은 1855년이다. 그러니까 ‘송남잡지’는 게일이 만든 ‘한영자전’보다 42년 먼저 집필한 책이다.

1855년에 나온 '송남잡지'에 '을사년'이 설명돼 있다. '이 생에서 아무런 낙이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출판되지 못하고 저자 초고만 서울대 도서관에 있다가 고향 충청도에서 등사본이 발견됐다. 1986년 성균관대 임형택 명예교수가 영인본으로 출간한 이 책 264페이지에 ‘乙巳年’(을사년)이라는 항목이 보인다.

俗以乙巳年凶爲畏 故今無生樂者言之(속이을사년흉위외 고금무생락자언지)

해석하면 이러하다. ‘세속에서는 을사년을 흉하게 여겨서 두려워한다. 그래서 지금 생에 아무 즐거움이 없는 것을 일러 을사년이라고 한다.’(조재삼, ‘松南雜識’(1855), 임형택 해제, 아세아문화사, 1986, p264) 초야에 묻혀 살던 한 선비 기억 속에 ‘아무 낙도 없을 정도로 흉하고 두려운 을사년’이 있었다는 뜻이다.

조재삼이 송남잡지를 탈고한 1855년은 세도정치가 극성을 이루던 시기다. 조재삼이 살던 시기의 ‘을사년’은 1845년이다. 순조와 헌종에 이어 철종 치하에서 세도 집단 묵인 속에 지방 탐관오리가 환곡과 토지세와 군정세를 무법하게 징수하며 가렴주구를 즐기던 시기였다. 이미 19세기 초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용이 “한 사내가 군정을 피하기 위해 ‘성기를 잘라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썼을 정도였다.(정약용, ‘다산시문집’4, 哀絶陽(애절양))

하루하루가 굶주림이었고 가난이었고 고통이었으니 조재삼은 ‘마치 을사년 같다’고 기록한 것이다. ‘송남잡지’에 기록된 ‘을사년’은 1785년 기근과 조재삼 생전인 1845년에 벌어진 모종의 사건으로 추정할 수 있다.(조항범, ‘’을씨년스럽다’의 어원에 대하여’, 한국어학 64권, 한국어학회, 2014)

그 표현이 처음 보이는 기록이 1855년 문헌이고, 42년이 지난 1897년 외국인이 쓴 어학사전에 다시 언급됐다. 따라서 세기를 넘긴 1905년 을사조약은 이 ‘을씨년스럽다’는 표현과 아무 상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