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NHK 조선어 전공 아나운서 야마시타 도루(윗 사진 맨오른쪽)씨가 가수 조용필(가운데)과 찍은 사진. /야마시타 제공

야마시타 도루(山下透·64)씨가 서울에 왔다. 한국⸱한국어⸱한국의 방송에 미친 인물. 초등학교 때 만난 ‘세계의 언어’라는 그림책에서 유독 한국말이 꽂혔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같았단다. 역시나 나라현 덴리대학 조선어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단파 라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잡지 ‘월간 단파’에서 5년간 일했다. 어느 날 KBS 일본어 국제 방송을 듣는데 NHK(일본 공영방송)가 조선어 전공 아나운서를 뽑는다는 게 아닌가. 운명이다 싶었다. 1987년 합격해 오늘에 이른다. NHK월드-재팬, 여전한 그의 일터다. 일본 뉴스와 한국 관련 뉴스를 재편집해 한국어 전공 일본인 스태프와 일본어에 능숙한 재일 교포가 방송한다.

총 208회. 야마시타씨가 1979년부터 올해까지 한국을 방문한 횟수다. 그가 본격적으로 간코쿠 오타쿠(한국 덕후)가 된 것은 1980년 무렵. 무작정 KBS가 보고파 여의도 아나운서실을 찾았다. 목소리로만 듣던 뉴스의 달인 최평웅 아나운서를 실제 보다니! 더구나 그는 아마추어 햄(HAM) 회원에 무선 송⸱수신 기능 라디오를 책상 옆에 두고 있었다. 감격! 각종 한국어 자료와 함께 아나운서 명단을 선물로 받았다. 그날 이후로 KBS 뉴스를 다 듣고 나서 아나운서 이름 맞히기가 취미가 됐다. 현재 카세트테이프 3000개에 MP3 2000, DAT 파일 1000, 미니디스크 500개, 각종 스크립트까지. 그의 집은 거대한 한국 라디오 방송 자료실을 방불케 한다.

북한에도 세 차례 갔다. 1995년 평양 능라도 경기장. 무려 15만 관중이 운집한 미국과 일본의 프로 레슬러 대결. 안토니오 이노키와 릭 플레어가 맞붙었다. 이노키의 스승인 역도산의 고향이 함경도 홍원이란 인연 때문에 이뤄진 메가 이벤트. 오늘날 이종격투기의 시작인 셈이다. 야마시타씨는 조선어-일본어 통역으로 일했다. 개인 여행으로 간 평양과 원산 일대는 잊을 수 없다. 특히 관동팔경 중 하나인 삼일포가 기억에 남는다고. 2005년 조용필의 평양 류경체육관 콘서트 때도 직접 가서 통역과 취재를 했다.

2016년 북한이 대남 심리전 일환으로 난수방송을 했을 때, 해설을 하는 야마시타 /야마시타 제공

나는 그를 2007년 도쿄 시부야에서 처음 만났다. KBS와 NHK 요원 교환 파견 프로그램을 통해서. 웃는 인상, 유쾌한 말솜씨가 인상적인 호인이었다. 공교롭게 2018년 다시 출장을 갔는데 안 보여 물으니 휴무. 팀장에게 연락을 부탁했고 저녁 식사 때 올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외모가 많이 변했을 텐데요.” “어디가 아팠나요?” 놀랍게도 성전환을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과연. 피부가 뽀얘졌고 가슴이 나왔다. 왜? “사실 어렸을 때부터 여자아이들과 노는 게 즐거웠습니다. 내 안에 여성이 있구나, 느꼈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정체성을 찾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55세 때 방콕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가족의 반대는? “아내가 뜻대로 하라며 오히려 격려해 주더군요. 사실 제 방송을 좋아했던 팬이 지금의 아내거든요. 아들은 한동안 싫은 티를 내다가 요즘은 덤덤해졌습니다.” 어느덧 8년. 여성으로 살았는데 후회는 없고 예상대로 좋다고 한다.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겪는 오해나 편견은 여전하지만,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야마시타 도루 씨는 55세 때 남성에서 여성이 되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사회적 편견에 당당히 대처하고 있다. /야마시타 제공

“사회생활 하면서 이름과 얼굴을 확인할 때 미스매칭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합니다. 그래서 ‘혼닌데쓰(本人です·본인입니다)’라는 말을 수시로 해야 하지만 재밌기도 해요.” 예전엔 ‘제가 사진 속 사람 맞습니다’ 하면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렸는데 요즘은 웃으며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하는 반응이 늘었다고. 불편해도 이름은 안 바꾼다. 원래 이름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아쉽고 아플 것 같기 때문. 여성 이름을 하나 갖고 있긴 하다. 편한 관계에선 미유키(美幸)를 쓴다. 한국을 200여 차례 왔는데 어디가 가장 좋을까. “경주죠. 신라 천년의 고도. 특히 장엄한 고분들은 일본 나라현(奈良縣) 고분군과 유사해요. ‘나라’라는 이름도 한국어 ‘나라’에서 온 것입니다. 두 나라는 유대와 친교가 마땅한 사이죠.”

한국인과 일본인, 어떤 게 같고 다른가? “국적 아닌 사람을 봐야죠. 오사카⸱교토 등 간사이인(關西人)은 한국 사람과 비슷해요. 급하고 정 많고 열정적이고. 무반응에 시큰둥한 도쿄 사람, 싫어하고요.”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소회는? “기쁩니다. 두 나라 사이가 나쁘면 많은 사람이 고통받습니다. 재일 교포, 기업인, 유학생 모두. 한국에서 사는 일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젠 국력도 대등하니 미래를 봐야죠. 양국 젊은이들에게서 배웁니다.” 주말인 오늘 남산타워와 도쿄타워는 한일 수교 기념으로 동시 점등 행사를 펼친다. 이럴 때 쓰는 한본어(韓本語)⸱日韓믹스어가 있다. 체고카요(チェゴかよ), ‘최고’와 ‘かよ’를 합친 것. ‘최고네요’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