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쇠창살이 보인다. 비좁은 방은 컴컴하다. 여긴 어디지? 몸을 일으켜 움직이려는데 ‘철컹’. 왼쪽 손목에 수갑이 채워져 있다. 기둥과 연결돼 옴짝달싹 못 하게. “살려줘!” 전기톱 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 벽에 붙은 문구가 보인다. ‘살인마의 눈을 피해 탈출하세요.’ 나 설마 갇힌 건가?
“뭐야~. 오예, 신난다!”
어떤 사람들은 자발적 갇힘을 선호한다. 감옥, 방, 선실 등 어디라도 좋다. 정보 공유가 목적이라는 온라인 카페 회원 수를 보고 추정컨대 이런 희한한 취향의 사람이 국내에 최소 11만 명쯤 있다. 경험만 해 본 사람은 더 많을 것이다. 이들은 밀실 콘셉트의 방이 여러 개 있는 ‘방탈출 카페’를 돈 주고 찾는다. 갇혀야 하는데 두려움은커녕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방탈출이란 탈출을 목표로 주어진 문제를 차례로 풀어 나가는 밀실 추리 게임을 이르는 용어다. 과거 ‘괴짜들의 취미’로 여겨졌으나 최근엔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관광 명소 홍보를 위해, 기업이 신입 사원 연수를 위해 이 콘셉트를 도입하기 시작했다는데. 삼일절 교육 목적으로 자녀를 데리고 이곳을 찾는 부모도 있단다. 뭣 하러 돈 주고 제 발로 걸어 들어가 갇히는 것이며, 도대체 여기서 뭘 배울 수 있다는 것일까.
◇뮤지컬 속 주인공 되어
입장 전 서약서에 서명을 한다. “밀실에서 본 그 무엇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매력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를 제출한 뒤 안대를 쓰고 밀실로 입장. 제한 시간을 표시하는 벽시계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힌트를 찾아 시간 내에 탈출하는 것이 목표다.
눈을 뜨는 순간 별천지다. 실존했다는 알카트라즈 감옥, 으스스한 점집, 피로 물든 수술실, 신비로운 분위기의 신전, 귀신이 나온다는 폐교…. 분위기도 콘셉트도 가지각색이다. 몸이 묶인 채 눈을 뜨기도, 일행과 떨어져 각각 다른 방에서 눈을 뜨기도 한다. 건강 문제로 지인들과 음주 대신 방탈출을 시작했다는 직장인 김성일(35)씨는 “낯선 곳이라는 짜릿함과 분위기가 주는 몰입감, 탈출이라는 목표와 시간제한도 있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고 했다.
최근 홍대입구역 근처에서는 “배우 두어 명(정확한 숫자는 비밀)이 몰입을 돕는다”는 방탈출 게임이 등장했다. 이용자 반응에 따라 주연 배우와 조연 배우의 대사, 반작용 역시 달라진단다. “작은 뮤지컬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는 후기 일색. 비슷한 콘셉트의 방탈출 경험이 있다는 한모(32)씨는 “외국인이 튀어나와 영어로 말을 걸어 깜짝 놀랐다”며 “갱단이 활동하는 미국 거리를 탐험하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가짜) 피가 묻을 수 있다”며 방수복과 방수화를 제공하거나, “암벽을 타고 오르는 구간이 있어 치마를 권하지 않는다”는 곳까지. 지난달 ‘백방’(100번째 방탈출)을 달성했다는 한 직장인은 이렇게 말했다. “외부와 단절된 채 도심 한복판에서 바닷속과 우주까지 누빌 수 있는 신비로운 공간.”
◇62만원 내고 게임한다
※목적지를 찾아가시오. 백발의 여성이 당신을 노려보는 골목 안 2층 집입니다.
이름은 방탈출인데 집합 장소가 혜화역 2번 출구다. 지도와 함께 도착한 한 통의 문자. 지령에 맞춰 목적지를 찾아가면 실제 낡은 빌라를 개조해 만든 공간이 나온다. 집에 얽힌 사연을 찾아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야외 방탈출’이다. 아예 야외에서만 진행되는 콘셉트도 있다.
도입 초기 방탈출 규모는 실내에서 1~2개로 이어진 방을 탈출하는 식으로 비교적 평이했다. 그러나 건물 몇 채를 통째로 사용하며 배우가 수백 명까지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 ‘대탈출’, ‘여고추리반’ 등이 유행하면서 많게는 5~6개까지 방이 이어지거나 야외에서 진행하는 남다른 스케일의 방탈출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입장료가 오르는 건 당연지사. 통상 1인당 3만~4만원이지만, 최근에는 6만9000원짜리도 등장했다. 인원 제한도 10명까지라 “할인을 받아 62만원을 내는 기염을 토했다”는 이용자도.
◇교육 목적으로 활용
“삼일절 앞두고 아이들 교육 목적으로 2주 전부터 알아봤어요~.”
40대 초반인 한 ‘워킹맘’은 지난해 삼일절을 맞아 두 초등생 자녀를 데리고 방탈출 카페에 다녀왔다. 독립투사가 돼 비밀 지령을 풀고 임무를 완수하는 콘셉트. 매년 3월 예약은 ‘하늘의 별 따기’란다.
인기에 힘입어 교육이나 홍보 목적으로 방탈출 게임을 벤치마킹하기도 한다. 탈출을 목표로 문제의 정답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만큼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것. 한 대기업은 지난해 그룹 차원에서 축구장 24개 규모(약 5만 평) 연수원을 방탈출 세트장으로 꾸며 화제가 됐다. 신입 사원들은 3시간 동안 미션을 달성하며 경영 이념이나 가치를 배운다.
지자체와 공공기관도 마찬가지. 경주시는 지난해 말 ‘관광 비수기 탈출’을 목표로 첨성대에서 시작하는 야외 방탈출 이벤트를 열었다. 미션을 수행하며 유적지 곳곳을 설명하는 식. 경주화랑마을이 운영하는 야외 방탈출은 지난해 이용자 7000여 명을 기록했고, 서울 송파구·인천 남동구·광주 동구·울산 동구 등이 관련 이벤트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제76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국방부까지 용산구 일대에서 야외 방탈출을 진행했다.
인기 비결은 뭘까. 골치 아픈 현실에서 탈출해 어디로든 도피하고픈 현대인의 고충이 반영된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나가기’를 누르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단체 대화방,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애환을 1~2시간의 자유롭지만 단절된 공간에서 풀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방탈출 ‘팬’인 기자 역시 서글프지만 동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