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이까지 내려오는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둥그런 클로시 햇을 쓴 여인. 가슴팍으로 들어 올린 오른손에는 태극기, 왼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었다. 오른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내딛는 모습이 무언가 설레면서도 비장한 느낌이다.

한국 여성 독립운동의 선구자,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알려진 김란사 선생(1872년 9월 1일~1919년 3월 10일)을 구현한 피규어다. 조선 최초의 여성 유학생으로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를 졸업한 뒤 교육과 사회 진보에 헌신했다. 독립운동가 피규어 제작을 이어가고 있는 ‘위인 프로젝트’가 광복 80주년을 맞는 올해 3·1절을 기념해 만들었다.

“이번 피규어는 그녀가 1919년 의친왕의 밀지를 받고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는 상징적 순간을 담아냈습니다. 김란사 선생의 여정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를 향한 모든 이의 열망과 연대의 상징입니다.”

지난 21일까지 진행된 이 ‘김란사 프로젝트’ 펀딩은 목표 금액(600만원)을 채우지 못해 무산됐다. 위인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총괄 PD 김은총(37)씨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앞서 제작한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시리즈를 이어간다든지, 유명한 독립운동가만 내놓는다면 수익을 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제 목표는 아니에요.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 그분들의 메시지를 전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 일을 계속하는 것뿐입니다.”

위인 프로젝트 총괄PD 김은총씨가 지난 21일 서울 방배동 사무실에서 자신이 제작한 피규어를 보여주고 있다. 피규어는 왼쪽부터 김구 선생, 김상옥 의사, 안중근 의사, 남자현 선생.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독립운동가에 꽂힌 피겨 덕후

위인 프로젝트는 2017년 ‘안중근 의사 좌상 피규어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30건 안팎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주로 독립운동가들이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도 피규어로 제작했다.

-이 일을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오래 품은 비전 같은 게 있진 않아요. 대학을 마치고 2016년에 귀국했는데, 그때 안중근 의사를 다룬 뮤지컬을 본 게 계기였습니다. 독립운동을 생각하면 온갖 고초를 겪어가며 고달픈 일을 하는 인상이었는데, 처음으로 독립운동가들을 ‘히어로’처럼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피규어를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왜 하필 피규어였나요.

“제일 친숙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배트맨을 좋아해서 피규어를 수집하기도 하고, 레고도 잔뜩 가지고 있었어요. ‘굿즈’의 종류는 많지만, 이 독립운동가들을 멋진 피규어의 모습으로 환생시키면 다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힘들 줄 모르고 호기롭게 뛰어든 거죠.”

아이디어만 갖고 ‘안중근 좌상’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정부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도움을 받진 못했다. 수소문 끝에 경기도 안산의 금형 제작 업체를 구해 시제품이 나왔다.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했는데, 금형 제작 비용이 많이 들어 필요한 모금액이 1900만원에 달했다. “기대와 달리 반응이 뜨뜻미지근했어요. 언론사에 홍보 메일을 보내고 정치인 모두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당시 한 유력 정치인이 피규어를 여러 개 사고 SNS에 올리셨더라고요. 간신히 완판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의 입상 등으로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하지만 금형으로 찍어내다 보니 디자인 단계에서 기획한 섬세한 얼굴 표정, 손가락의 모양 등이 뭉개지는 경우가 생겼다. 깃을 세운 재킷을 입고 총을 겨누고 있는 안중근 의사 두 번째 작품 때 일이었다. 펀딩에 참여했던 800여 명 중 10%가 환불을 요구했다.

◇수익성보다 작품성

그즈음부터 위인 프로젝트는 ‘수익성’과는 멀어졌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 ‘덕업일치(취미와 일이 맞아떨어진 것)’라고 해야 할까. 수익의 일부는 해당 독립운동가의 유족에게 소액이나마 돌려드리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많이 파는 게 수익과 목적 모두에 부합하지 않나요?

“저도 피규어 마니아로서 ‘퀄리티’는 포기할 수 없더라고요. 피규어 수집가들은 예민해요. 섬세하지 않은 것, 허무맹랑한 것은 절대 소장 가치가 없습니다. 소량 생산하더라도 제작 단가를 올리고 디테일과 완성도를 높이기로 했습니다.”

첫 작품이 3만원 안팎이었는데, 최근 프로젝트는 10만원을 넘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마니아층이 생겨 전체 컬렉션을 소장한 후원자도 있다고. “제가 만들었지만 마지막 하나의 샘플도 남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후원자들이 나중에 ‘펀딩을 놓쳤는데 구할 수 없나요?’ ‘전체 컬렉션을 완성하고 싶어요’라고 연락 오는 경우가 있어 하나씩 내놓다 보니 정작 저는 빈손이네요.”

-김란사 선생 피규어는 좀 서정적인 느낌입니다.

“저는 똑같이 구현하는 건 큰 의미도 없고 멋있지도 않다고 생각해요. 허구성을 가미해 인생과 정신을 더 극적으로 담고 싶었어요. 그래야 그분의 히스토리를 알게 되고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요.”

-모두 직접 디자인하시나요.

“네. 깊게는 아니지만 그분들에 대해 공부하고 인상적인 순간을 상상해봅니다.”

-실제와 상당히 다를 수도 있다는 거네요.

“다시 말하지만 수집가들은 예민해요. 이순신 장군 때는 ‘복장이 잘못됐다’ ‘칼이 어떻다’ 같은 지적이 들어오기도 했어요. 나름의 검증과 고증 작업을 하거든요. 가령 홍범도 장군, 김상옥 의사 피규어 등에 쓰인 총 같은 경우, 그 시대에 맞는지 등을 따져보는 겁니다.”

◇댕기 휘날리는 유관순 열사

널리 알려진 유관순 열사의 모습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찍힌 사진. 모진 옥고를 치러 실제 얼굴보다 상당히 부은 모습이라는 분석이 많다. 위인 프로젝트에서는 태극기를 높게 쳐들고 입을 크게 벌리며 함성을 지르는 진취적인 소녀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게임 캐릭터 같은 인상이다.

-상당히 파격적입니다.

“저는 그 부은 얼굴을 재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잔인한 역사잖아요. 잔다르크 같은 여장군, 군중을 이끄는 리더의 강렬한 인상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게 어떻게 유관순 열사냐. 왜 독립운동가로 장난치나’ 하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고함을 치는 '여전사'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길게 땋은 머리와 저고리 고름도 휘날린다. /김은총씨 제공

-위축됐을 것 같은데요.

“역사적 인물을 다루다 보니 그런 어려운 지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현대적 영웅상을 담은 독립운동가를 표현하는 것을 제 정체성으로 삼고 싶었어요. 똑같이 만드는 건 아름답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요.”

어려움이 있었던 탓인지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 중 하나라고. 원작에서는 저고리의 고름과 길게 땋은 댕기 머리가 힘차게 휘날리는 것까지 담았는데, 제작 과정에서 내구성 등을 고려해 머리를 낮게 묶은 다소 차분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미국 유학 시절 이승만은 어떨까

-대중이 호응한 건 어떤 프로젝트였나요.

“김상옥, 남자현 선생입니다. 디자인이 역동적으로 잘 나왔고, 의미 부여가 잘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김상옥 의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양손에 권총을 든 모습, 남자현 선생은 장총을 어깨에 메고 고개를 치켜든 모습이다. 남자현 선생은 46세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배역의 실제 모델이다. 김씨는 “남 선생은 단지(斷指)까지 할 정도로 강인한 분”이라며 “엄마 같은 푸근한 인상의 피규어는 선생의 정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제작 기획은 어떻게 하시나요.

“처음에는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제 개인 작업에 가깝습니다. 기일이 다가오거나 영화 소재 등 주목받는 일이 있는 분들을 선정하고, 나름의 공부를 해서 디자인 작업에 들어갑니다.”

-특별히 주목하는 부분이라면.

“사실 독립운동사를 보면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의거를 하기 전에 죽거나 잡히거나 배신을 당했죠. 안중근·윤봉길 의사처럼 극히 일부 성공한 역사를 우리가 기억하고 기리는 거예요. 이름도 없이 사라진 그런 인물들을 계속 다뤄보고 싶어요.”

-올해 계획은.

“이회영·지청천 선생 등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 선생은 군복도 멋있고 심미적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는 이승만 전 대통령도 고민 중입니다. 이 전 대통령은 미국 유학생 시절의 패기 있고 다부진 모습을 담고 싶어요.”

김씨는 펀딩 무산으로 프로젝트가 좌초될 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 듯했다. “29세에 위인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사업화를 꿈꿨던 첫 마음이라면 아마 실패겠죠. 구독자 10명뿐인 유튜브 채널에 계속 콘텐츠가 올라오는 셈이랄까요. 하지만 이 일을 계속해 제가 50대, 60대가 되면 나름의 히스토리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꾸준히 밀고 나갈 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기억해주기만 한다면, 계속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위인프로젝트 김은총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