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출신의 땅콩버터들이 275g의 비좁은 진공팩에 몸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고소하지만 비장한 냄새를 풍기며. 총 50팩에 담긴 ‘짜 먹는’ 땅콩버터들은 지난해 미 항공우주국(NASA)의 스페이스X 팰컨9에 차곡차곡 몸을 포개 탑승했다. 목적지는 국제우주정거장(ISS). 이들에게 주어진 막중한 임무는 ‘6개월간 우주 비행사들의 건강을 책임지라.’
제조사는 NASA로부터 “땅콩버터가 우주 비행사들의 모험에 함께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영양사들과 협력해 제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간 땅콩에 용도에 따라 식용유(식물성 유지)나 설탕 등을 넣어 만드는 땅콩버터는 대표적 ‘고열량’ 식품이다. 탐험가나 산악인의 필수 준비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런데 땅콩버터가 최근 다이어트하는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먹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저걸 먹자”는 것이다. 체중 감량을 위해서라면 열량이 낮은 음식을 택해야 하는 게 아닐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지, 실제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는지, 혹 ‘세계땅콩버터연합회’ 같은 곳에서 꾸며낸 계략은 아닌지 확인해 봤다.
◇땅콩버터 고추장 진미채
32g에 190Kcal. 미국 내 땅콩버터 시장에서 1·2위를 다툰다는 한 브랜드의 땅콩버터 칼로리다. 티스푼으로 두 숟가락 정도다. 참고로 통상 공깃밥 반 공기가 150~160Kcal다. 이럴 거면 밥을 먹지, 왜 땅콩버터를 먹겠다는 걸까.
갑작스러운 땅콩버터의 유행은 일부 연예인으로부터 시작됐다. 가수 강민경은 유튜브 채널에 “다이어트 중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다”며 콩물에 메밀면을 말고 땅콩버터를 넣어 먹는 모습을 공개했다. 올해 64세인 방송인 최화정은 땅콩버터를 곁들인 팬케이크 등을 ‘아침 식단’이라며 소개했고, 배우 한가인은 “아침 식사로 사과에 땅콩버터를 발라 먹는다”고 했다. 사과의 달고 신 맛과 땅콩버터의 고소함이 어울린다는 이유로 미국 등에서는 보편화한 조합.
대중은 “동안과 날씬함의 비결 아니냐”며 열광했다.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서울 성수동에는 직원이 눈앞에서 직접 땅콩을 갈아주는 ‘땅콩버터 카페’가 등장했다. 지난해 온라인 쇼핑몰 마켓컬리에서는 땅콩버터 판매량이 전년 대비 약 다섯 배 늘었고, 소셜미디어에는 ‘땅콩버터 비빔면’ ‘땅콩버터 고구마빵’부터 ‘된장 땅콩버터 샐러드’ ‘땅콩버터 고추장 진미채볶음’ 레시피까지 등장했다! “맛있어서 많이 먹었는데 뱃살이 쏙 들어갔다”는 진위를 확인하기 어려운 문구도 함께.
◇문제는 땅콩 함유량
땅콩버터의 진실은 뭘까. 전문가들은 땅콩 자체의 효능에 주목한다. “혈관 건강에 좋은 불포화지방산과 단백질이 풍부하기 때문에 포만감이 오래 지속돼 식사량 조절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땅콩도 콩이라 고기에는 없는 식이섬유까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쓰이는 구호품 중 하나인 ‘플럼피넛’ 역시 땅콩으로 만든 고열량 식품.
땅콩 함유량이 충분하다면 땅콩버터 역시 비슷한 효능을 낼 수 있다. 이 때문인지 1980년대 미국에서는 치아가 온전치 않은 노인들에게 고단백 식품으로 부드러운 땅콩버터가 권장되기도 했다. 다행히도 시중에 판매되는 땅콩버터 대부분의 땅콩 함유량은 90%를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그러나 구매 전 확인 필수).
지방산 등이 풍부하기 때문에 혈당지수(GI)가 낮은 식품인 것도 맞다. “아침 식사로 땅콩버터나 땅콩을 섭취하면 탄수화물이 많은 점심을 먹은 후에도 하루 종일 혈당을 조절할 수 있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가 2012년 영국 영양학 저널에 발표되기도 했다. 연구에 따르면 “땅콩과 땅콩버터는 섭취 후 최대 12시간 동안 포만감을 주는 호르몬 분비를 촉진한다”고.
◇흰 빵에 발라 먹지 말자
그렇다면 땅콩버터를 마구 때려 먹어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강재헌 강북삼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포만감을 주는 건 맞지만 땅콩버터 자체가 워낙 고열량이라 다이어트 식품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미국 영양학회는 ‘티스푼으로 두 숟가락’을 땅콩버터의 하루 권장량으로 본다.
추가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연예인들이 소개하는 땅콩버터는 대부분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순도 100%’의 땅콩버터라는 점, 그리고 우리가 쉽게 접하는 땅콩버터는 설탕·소금·식용유 등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설탕이 많이 들어간 땅콩버터는 오히려 혈당을 상승시킬 가능성이 있다. 또 팜유가 사용됐을 경우 트랜스지방이 포함돼 나쁜 콜레스테롤을 증가시킬 수 있다.
어떤 음식과 먹느냐도 중요하다. 정제 탄수화물인 흰 식빵 등과 함께 먹다가는 혈당 상승 지름길. 가장 중요한 건 ‘적당량’ 섭취다. 참, 첨가물 없는 땅콩버터는 달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땅콩 비린내가 날 수도 있다. 역시 맛있고 달고 살 안 찌는 음식은, 세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