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아버지는 아침엔 조선일보, 저녁엔 동아일보를 보셨다. 덕분에 나도 아침이면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를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석간 동아일보의 ‘휴지통’ 같은 짧은 칼럼을 읽으며 세상 물정을 익혔다. 대학생이 된 뒤엔 내 돈으로 한겨레도 구독했다. 보수 신문과 진보 신문을 함께 보는 건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때는 집집마다 종이 신문을 보았고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버는 친구도 많았다.
중학교 1학년부터 팝송을 들으며 ‘월간팝송’을 구독했다. 영국에는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이라는 헤비메탈의 양대 산맥이 있고 ‘세계 3대 기타리스트’에 속하는 에릭 클랩턴이나 지미 페이지를 능가하는 뮤지션은 없다는 식의 얕은 지식으로 무장하는 수준이었으나 그래도 그 잡지 덕분에 대중문화에 대한 목마름을 어느 정도는 채울 수 있었다. MBC라디오 프로그램 ‘두 시의 데이트’에서 나눠주는 ‘POP PM 2:00’라는 무료 리플릿을 받아보려고 광화문에 있는 오디오 대리점 ‘태광 에로이카’까지 간 건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인터넷도 모바일도 없던 세상이라 중학생 팝 음악 팬에게 주어진 정보는 한없이 부족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순문학 잡지 ‘현대문학’을 1년 정기 구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발단은 친구들과 빈집에 모여 친 고스톱이었다. 학교 공부는 하기 싫고 그렇다고 가출할 용기까지는 없던 친구들 몇 명이 모여 가끔 스트레스 해소용 고스톱을 치곤 했는데 한번은 내가 그날의 판돈을 휩쓰는 이변이 벌어진 것이다. 도박엔 통 소질이 없던 내가 돈을 딴 게 너무 신기한 나머지 그날의 성과를 ‘현대문학’에 전액 투척했다. 물론 그건 국어 권희돈 선생님(돼지가 기뻐한다는 뜻이니 부자 이름이라며 때때로 기뻐하셨다)이 수업 시간에 ‘문학사상’이라는 월간지에 실린 시를 한 편 소개한 것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모름지기 인생을 알려면 고등학생도 문학 잡지 한 권쯤은 달마다 읽어 줘야 한다는 지적 허영심이 온몸을 휘감을 때였다. 이런 치기 어린 행동 덕분인지 나는 영문과를 나와 카피라이터로 일을 하는 등 계속 글과 메시지를 다루는 일에 종사하다가 이젠 책 몇 권을 내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게 그때의 구독 덕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바야흐로 ‘구독 경제’의 시대다. 이제는 신문과 잡지를 넘어서 OTT, 음악, 심지어 가구나 침대까지 돈만 내면 뭐든지 구독할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 집도 코웨이에서 침대 서비스를 구독 중이다. 이쯤 되면 구독이 아니라 할부 인생에 가까운 듯하지만, ‘구독’이라는 말이 주는 마법 같은 안정감 덕에 월 납부금을 별다른 저항 없이 내고 있다. 나는 넷플릭스 충성 구독자인데 얼마 전에 쿠팡플레이에도 가입했다. 박찬욱의 드라마 ‘동조자’를 보기 위해서다. 애플TV에도 가입했다. 김봉석 작가가 만든 ‘장르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에 갔다가 박상준 대표가 벤 스틸러의 ‘세브란스’라는 드라마가 너무 재밌다고 강권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세브란스’ 시청을 끝내고 다른 콘텐츠를 뒤져 보니 ‘맵다 매워! 지미의 상담소’라는 드라마 또한 쏠쏠하게 재밌어서 틈나는 대로 보고 있다. 내친김에 아직 보지 못한 이민진 원작의 드라마 ‘파친코’까지 달려볼까 고민 중이다.
요즘은 극장에서 혼자 영화 한 편을 봐도 1만5000원이 깨지는데 OTT는 온 가족이 한 달간 여러 편을 봐도 1만원 정도면 충분하기 때문에 훨씬 경제적이다. 더구나 TV는 물론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에서도 이어 볼 수 있으니 편리하기도 하다. 이렇듯 ‘구독’은 어느덧 소비자의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마치 헬스장에 1년 치 등록해 놓고 초반 몇 번 가다 말아버리는 것처럼.
구독의 홍수 속에 살면서 가끔 이런 생각도 해본다. 만약 사랑도 구독이 가능하다면 어떨까? 일정 금액을 내기만 하면 주기적으로 누군가의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한다면? 어쩌면 나는 구독 서비스로 외로움을 상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는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열지만, 실은 모두 한 사람(데이지)에게 닿기 위한 무의미한 구독(?)이었다. 개츠비가 관계를 만들어 가던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구독하는 OTT, SNS 팔로잉, 멤버십 서비스와 얼마나 다를까?
신문을 넘어서 침대와 사랑까지 구독하는 시대. 어쩌면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더 많은 구독’이 아니라, ‘더 많은 실천’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끝까지 보고, 기대했던 책을 완독하고,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직접 마음을 표현하는 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라도 ‘구독 목록’을 좀 정리하고 하나씩 제대로 소비해 보는 건 어떨까. 사랑도 관심도 결국은 우리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