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학부모총회(학총) 시즌이다. 대부분의 학교가 3월 둘째 주부터 학교 운영 계획을 소개하고 담임 교사를 만나는 공식 행사로 공개 수업과 학총(혹은 교육과정 설명회)을 연다. 그럼 집집마다 학총에 참석할 것인지, 반 대표·녹색어머니회·급식 모니터링 위원 등 ‘감투’를 쓸 것인지 여부 등을 고민하게 된다.
참석하기로 한다면 가장 큰 고민은 차림새. ‘학총룩(학부모총회 옷차림)’이란 용어가 해마다 이 무렵 인기 검색어로 떠오르고 쇼핑몰의 키워드를 장식하는 이유다. 담임 교사는 물론 다른 학부모들에게 첫선을 보이는 자리,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너무 튀어도 안 되고 너무 만만해 보여서도 안 된다는데.
◇‘꾸안꾸’냐 ‘꾸꾸꾸’냐
기자는 올해 학부모가 됐다. 아이에게 초등학생이 되니 어떠냐고 물으면 개다리춤을 추며 “좋지!”라고 답한다. 책가방과 단정한 티셔츠, 새 운동화 따위를 준비하면서 어쩌면 아이보다 더 긴장하고 설렜는지도 모르겠다. 괜히 마음이 벅찼던 입학식을 지나고 나니, 학총이 그야말로 화두가 됐다.
잠시 조용했던 아이 유치원 친구들 단톡방이 와글와글. “학총 가실 거죠? 너무 긴장돼요ㅠㅠ” “입학식 때 보니 엄마들 너무 힘주고 와서 기죽었어요” “급하게 피부과라도 다녀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어요” “회사 빠지기 어려워서 못 가는데 후기 좀 꼭 부탁드려요”....
징글징글한 알고리즘. 기자의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은 ‘학총룩’ ‘학부모총회 꼭 가야 하는 이유’ ‘상담 때 절대 하면 안 되는 말’ 같은 콘텐츠에 점령당했다. 대체 너는 나의 고민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는가. 찜찜하지만 클릭해보게 되는 마음. ‘총회룩, 세 가지는 하지 마세요’부터. “(1) 너무 편하거나 너무 튀는 옷은 피하세요.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에 스카프나 목걸이로 포인트한 고급스러운 룩 추천. (2) 너무 고가의 가방은 피하세요. 가방만 튀어 보이는 브랜드보다는 전체적인 느낌과 매치해주세요. (3) 너무 화려한 메이크업은 피하세요. 꾸민 듯 안 꾸민 듯(꾸안꾸)하게.” 음, 합리적인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이런 콘텐츠도 꽤 많았다. “학총 가시나요? 저는 새로 산 검정 트위드 재킷을 입고요, 팔찌랑 반지는 까르띠에, 시계는 샤넬, 반 클리프 아펠 귀걸이를 했어요. 디올 스카프를 할까 하다가 이건 투머치(too much). 가방은 클래식 샤넬로, 디올 구두로 마무리했어요. 이런 날이라도 차려입어야죠.” 헉, 뭐야 이거. 스스로 ‘꾸꾸꾸(잔뜩 꾸몄다)’라고 한다지만, 이런 수천만원룩이 필요하다고?
◇‘전재산 룩’은 곤란해요
선배 엄마들의 조언도 이어졌다. “연차를 내서라도 1학년 학총은 꼭 참석해야 돼. 1학년 친구 엄마들이 평생 간다? 꾸안꾸 명심하고.” “나는 한다는 사람이 없어서 사다리 잘못 탔다가 억지로 반 대표 맡았는데 1년간 너무 시달렸어.”
분당에 사는 2학년 엄마 왈, “우리 딸이 오늘 ‘엄마, 샤넬 말고 셀린느 들고 와. 샤넬은 좀 그래’ 이러더라? 샤넬은 너무 힘준 것 같은 느낌이라는 거지. 있는 거 없는 거 다 하고 가면 애들이 좀 부끄러워해.” 이른바 ‘전재산룩’은 안 된다는 게 총회의 법칙이라고. 예물로 받아 남의 결혼식 갈 때나 한 번씩 햇빛을 보는 샤넬백, 결혼 전 ‘44반’에서 ‘66반’을 향해 가고 있는 40대 아줌마에게는 이제 너무 작고 어색하다. 어울리는 옷도 없다. 여기에 촌스러운 세팅의 보석까지 주렁주렁. 이런 식의 ‘영끌룩’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원에 사는 4학년 엄마 조모(40)씨는 “올해 처음 학총에 참석했는데 딸 말마따나 ‘시상식에 온 줄 알았다’”면서 “아이들 눈에도 평소와 다른 ‘블링블링’이 우스꽝스럽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했다. ‘전재산룩’의 안 좋은 사례 하나를 확인했다.
기자의 아이는 서울에서 학생 수가 꽤 많은 공립학교에 입학했다. 두 아이를 이 학교에 보낸 선배의 경험담. “1학년 엄마들은 분홍색 샤넬 트위드 재킷 같은 거 입는데 신경 쓸 필요는 없어. 1학년 때는 서로 눈 마주치고 인사하려고 들떠 있는데, 고학년 돼봐라. 옷도 편히 입고 와서 다들 먼 산 보고 있다? 어차피 각자 커뮤니티는 이미 꾸려졌고, 엄마들 친소 관계가 아이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시기도 끝났고.” 워킹맘인 이 선배는 그저 출근 복장 정도의 단정함만 챙겨가면 된다고 했다. ‘저 엄마 무난한데 친해지고 싶은 룩’이 최고라고. 학총룩보다는 학총에서 뭘 해야 하는지, 이 시기 다른 엄마들과의 친분을 어떻게 쌓아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이 많았다.
인스타그램과 쓰레드 등을 탐문하니, 올해도 역시 ‘꾸안꾸’가 대세인 듯했다. “모직 재킷에 통 넓은 청바지, 아식스 스니커즈 신을 거예요.” “트렌치코트에 검정 바지요. 스니커즈가 좀 힘 뺀 것처럼 보이겠죠?” “어두운 트위드 재킷에 청바지 입을 거예요.”
◇학총룩 시즌2가 왔다
사실 이 분야 전문가들의 진단과 조언을 종합하면, 학총룩에 관심을 가지는 건 초등학교, 그것도 초창기에 국한된 얘기라고. 이런 식이다. 유치부 총회는 젊고 아름다운 ‘패션 피플’이 많다. 파스텔 톤의 화사한 복장과 반짝반짝 주얼리가 화려하다. 초등학교 총회까지는 ‘아직’ 꾸민다. 다만 참석률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급격하게 낮아진다. 중·고등 총회의 경우 전쟁 직전의 엄숙한 분위기. ‘심정을 대변해주는’ 검정·회색 물결이 압도적이라고.
재작년 아들을 의대에 보낸 ‘대치맘’ 이모(49)씨의 전언이다. “학총룩은 에코백에 커피 담은 텀블러와 노트? 총회에서 집중해 기억하고 메모해야 할 게 얼마나 많다고. 뭘 신었는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과학고·영재고 설명회 때는 ‘노염색 올백발’ 어머니들도 종종 등장하신다고. 엄마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들었는지보다 ‘전교 1등 엄마’ 포스에 압도되는 게 이 시기의 특징.
강남 안에서도 대치와 압구정·서초는 분위기가 다르다. 유치원 기준, 상대적으로 테북(테헤란로 북쪽)은 주얼리와 신발·가방 등에 힘을 준 화려한 엄마가 많다. 반면 전문직 워킹맘이 많고 이미 ‘학원 라이드’에 찌든 대치(테남·테헤란로 남쪽)는 잿빛 낯색의 엄마도 많다고.
◇새 옷은 못 사도 ‘뿌염’이라도 하자
그날이 왔다. 3월치고는 추웠다. 검정 코트에 진회색 정장 바지, 검정 구두를 신고 검정 가방을 들었다. 말 그대로 출근 복장. ‘새것’은 없었다. 석 달 만에 미용실은 다녀왔다. 정수리에 삐죽삐죽 올라온 흰머리는 좀 감춰보자. 미용실 선생님도 귀신이다. “학부모총회 가시나 봐요? 요 며칠 많이들 오시더라고요.”
학교에 가까워 오니 결코 ‘하원룩’은 아닌, 꽤 차려입은 차림의 엄마가 많았다. 부지런히 스캔했다. 대개 꾸안꾸 스타일에 나름의 ‘한 방’을 장착한 차림. 옷은 튀지 않지만 디올 스니커즈(수십 명쯤)를 신었고, 명품 주얼리를 한두 개쯤 걸쳤다. 소재가 아주 고급스러운 정장에 샤넬 구두를 신었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학총은 별다를 게 없었다. 교실 뒤편에 서서 5교시 수업을 참관했다. 1학년이 40분간 집중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업 중 화장실에 가는 아이가 4명, 교실 뒤편에 아예 누워 있거나 ‘아무 말 대잔치’를 계속하는 아이, 선생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아이… 너무 산만해지자 동요를 틀고 율동을 한 뒤 다시 수업으로 돌아갔다(선생님 존경합니다).
오랜만에 구두를 신고 1시간 가까이 서 있었더니 뒤꿈치가 콕콕 쑤셨다. 학총 조언 중에 “서 있는 시간이 꽤 기니까 편한 신발을 신으라”는 팁이 그제야 이해됐다. 아이들이 하교한 뒤 엄마들은 자기 아이 책상에 앉아 학교의 방침과 주요 행사, 학부모회장 보고 등을 전달받았고, 담임 선생님의 ‘위로’ 시간이 이어졌다. “우리 아이들 아직 너무 아가죠?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오늘 발표 못한 아이도 나중에 다 잘하고요, 수업 태도도 2학기 되면 엄청 좋아져요. 오늘 집에 가셔서 아이 나무라지 마시고 잘했다고 칭찬해주세요.”(다시 한번, 선생님 존경합니다)
반 대표를 뽑을 순서. 숨 막히는 눈치 게임이 예상된다. 아이를 맡겼지만 학교 일에 나설 수 없는 워킹맘 입장에 별수 있나.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지원자가 있어 신속하고 아름다운 결말. 아이 책상 서랍과 사물함 상태를 ‘점검’하고, 교과서도 휘리릭 들춰봤다. 이때 아이가 나중에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 이 사랑해. 엄마가 항상 응원해” 같은 메모를 남겨두는 것도 ‘학총팁’ 중 하나였다.
사실 우리 반 기준으로는, 아이 수업 태도 관찰,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엄마들이 뭘 입고 뭘 들었는지는 정말 관심 밖이었다.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할 때 받은 인상은 대부분 비슷하다는 정도. 단정한 코트 차림이 많았다. 화려한 공주님이나 요란한 마녀는 없었다. ‘생존’을 위한 미소와 눈웃음을 장착한, 잔뜩 긴장한 1학년 ‘병아리 엄마들’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