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착각할 뻔했다. 분명 인천국제공항에서 4시간 20분이나 비행기를 타고 사이판에 도착했는데, 4박 5일간 내가 쓴 영어라고는 “Thank you(감사합니다)”와 “l lost my room key(방 열쇠를 잃어버렸어요)” 단 두 문장이었으니 말이다. 1990년대 시작된 한국인의 사이판 여행 덕에 호텔과 관광지엔 서툴지만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 기자처럼 영어 울렁증이 있다면 최고의 미국 휴양지.
그런데 사이판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2017년 33만명으로 극점을 찍은 후 줄곧 내리막길이다. 코로나 이후 하늘길이 다시 열렸지만, 재작년과 지난해 각각 17만명, 16만명만 이 섬을 찾았다. 사이판 관광 업계는 ‘도파민 중독’ 한국인들에게 사이판이 너무 익숙해진 탓이라 보고 있다. 새롭고 흥미로운 느낌이 덜하다는 분석. 하지만 묻고 싶다. 당신은 사이판을 지루하게 여길 만큼 정말로 잘 알고 있을까?
◇사이판은 미국령? ‘미연방’입니다
서태평양엔 열네 섬이 줄지어 있다. 이 섬들을 묶어 ‘북마리아나 제도’라 부른다. 사이판은 북마리아나 제도의 수도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여행 책자들은 사이판을 괌과 같은 미국령(U.S. Territory)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잘못된 정보다.
“괌은 미국령이지만, 사이판 등 북마리아나 제도는 미연방(U.S. Commonwealth)입니다. 북마리아나를 미국령이라고 표기하면 잘못된 표현입니다.” 현지 관광청의 이런 설명을 들었을 때, 처음엔 그게 뭐 대수인가 싶었다. 미국령과 미연방 주민은 모두 미국 시민권이 있고,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할 수 없다는 건 똑같기 때문. 하지만 현지 관광청에 따르면, 미연방 북마리아나 제도는 미국령에 비해 세금과 세관 등 여러 분야에서 더 큰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유엔이 ‘아직 완전한 자치권을 얻지 못한 영토’로 분류한 지역 17곳에 괌은 포함돼 있지만, 북마리아나 제도는 없다.
사이판은 크기가 제주도의 10분의 1 정도 되는 화산섬이다. 동서 6~12km, 남북 20km에 불과하다. 이 조그만 섬을 포함해 북마리아나 제도가 미연방이 된 데는 지난한 역사가 얽혀 있다. 이곳 원주민들은 17세기부터 스페인과 독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땐 자신들의 땅이 전쟁터로 바뀌는 걸 보고만 있어야 했다.
연이은 강대국의 지배는 북마리아나 제도 주민들에게 큰 고난이었고, 결국 1975년 국민투표를 통해 미국 연방이 되기로 결정한다. 미국의 보호를 받는 것이 외부 침략에서 자기들을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만세’ 절벽과 한국인 위령탑
사이판 북쪽으로 가면, 새파란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절벽이 있다. 바로 만세 절벽이다. 이곳 풍경은 반짝이는 코발트블루 빛깔 바다에 취해 발을 잘못 내디디면 어쩌나 걱정해야 할 만큼 황홀하다.
그런데 여기서 자살한 이들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이판에 있던 일본군들. 미군 등 연합군의 공격에 패색이 뚜렷했지만, 항복 대신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이곳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절벽에 ‘만세’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이다.
후대 일본인들은 만세 절벽에 위령비를 10여 기 세웠다. 사이판 관광 가이드 최준묵씨는 “엄지손가락 모양의 가장 큰 위령비 뒤에는 흰색 자국이 있는데, 관광 온 한국인들이 화가 난다며 붙인 껌이 떨어져 생긴 것”이라고 했다. 정말인가 하고 뒤를 살펴보니 흰색 자국 수십 군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여전히 붙어 있는 노란색 껌, 흰색 껌도!
만세 절벽에서 차로 5분 거리엔 한국인 위령탑도 있다. 강제 노역 등으로 사이판에 끌려왔다가 전쟁 속에서 희생당한 조선인들을 기리는 위령탑. 사이판 땅은 원주민만 사고팔 수 있다고 한다. 원주민 보호법에 따른 것인데, 북마리아나 제도 정부에서 한국인을 위로하는 공간으로 이곳을 내줬다고. 만세 절벽을 들렀다면 한국인 위령탑도 잊지 말고 방문해 볼 일이다.
◇사이판 파도의 비밀
보통 파도는 모래사장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큰 바위에 부딪쳐도 그렇다. 하지만 사이판 남서쪽 아긴간(Agingan)곶에서 북쪽 윙(Wing) 해변까지는 파도가 바다 한가운데서 부서진다. 새파란 파도가 모래사장에 닿기 전, 바다 중간에서 하얀 물방울로 흩어지는 것이다.
이 비밀의 주인공은 산호초. 바다 밑 화산암에 달라붙은 산호들이 계속 자라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산호초 군락의 길이는 약 14km에 이른다. 이 구간의 해변 모래사장엔 파도가 세게 치지 않는다. 천연 방파제를 만나 기세가 꺾인 파도는 모래사장을 잔잔하게 핥을 뿐이다.
그래서 사이판 서쪽 해변은 스노클링 천국이다. 이랜드켄싱턴호텔 등 대부분의 호텔과 리조트도 서쪽 해변에 있다. 숙소에 앉아 파도가 바다 중간에서 부서지는 모습을 온종일 보고만 있어도 좋다. 같은 바다지만 산호초 군락 앞뒤로 전혀 다른 바다 색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다. 뒤쪽은 짙고 푸른 빛깔을, 앞쪽은 투명하고 맑은 옥색을 띠는 사이판 바다에서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 아름다움을 감상한다.
‘마나가하섬’도 사이판 서쪽 바다에 있어, 바닷가 파도가 잔잔하다. 그 덕에 많은 관광객이 스노클링을 즐기는데, 크고 작은 형형색색 물고기들을 쫓아 물속을 돌아다니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그럴 땐 마나가하섬 안쪽 매점을 찾아가면 된다. 음식이 입에 안 맞으면 어떡하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떡볶이와 컵라면도 준비돼 있다. 한강에서 볼 수 있는 라면 즉석 조리기로 안성탕면, 너구리, 신라면, 짜파게티도 즐길 수 있다.
◇모진 태풍에도 결국 살아내는 나무들
사이판에는 몸통이 ‘ㄴ’ 자로 휘어진 나무가 많다. 어둑한 밤엔 그 부분에 귀신이 앉아 있을 것만 같은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이런 기이한 생김새는 사실 나무가 풍파를 온몸으로 겪어낸 흔적이다. 태풍에 뿌리가 뽑힌 채 쓰러진 나무들이 죽지 않고 살면서, 누운 몸통이 태양과 하늘을 향해 점점 솟아 ‘ㄴ’ 자로 휘어진 것이다.
사이판은 몇 년에 한 번씩 큰 태풍을 경험한다. 2018년 가정집 지붕을 부수고 리조트 창문을 깨뜨린 태풍이 섬을 강타했다. 오토바이가 가득 들어 있던 컨테이너가 도로 위를 날아다니다 코럴오션리조트 골프장에 박힐 정도였다. 박힌 장소가 바다를 유영하는 거북이를 볼 수 있는 코럴의 시그니처 홀 근처였다고 한다. 당시 코럴오션리조트 역시 태풍 피해가 심각했는데, 그 상처는 아문 지 오래. 태풍이라는 대자연을 겪어낸 초록 잔디와 파란 바다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그림처럼 고요하게 손짓하고 있었다. 오세요, 사이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