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최수연(34)씨는 따뜻해질 때까지 미룬 러닝을 오는 4월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각오가 무뎌지지 않도록 러닝 크루(달리기 동호회)에도 가입했다. 러닝화를 새로 구입하려는 최씨는 호카·온러닝·살로몬·아식스·브룩스 등의 브랜드 중에서 고민 중이다. “트렌디하고 옷 잘 입는 친구들이 신는 러닝화 브랜드들이에요. 러닝화 하면 나이키 아니냐고요? 제 주변에서는 별로 신지 않는 거 같아요. ‘핫’하지 않달까.”
운동화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절대 강자 나이키의 패권이 흔들리고, 신흥 브랜드들이 부상하고 있다. 이들의 약진은 시장을 지배해온 나이키의 방심이 만든 틈새에서 비롯됐다.
◇약진하는 신규 러닝화 브랜드
국내 운동화 시장 규모는 약 4조원. 2019년 3조1300억원에서 가파른 성장세다. 시장을 주도하는 카테고리는 러닝화다. 한국의류산업협회에 따르면, 러닝화 비율은 전체 운동화 시장의 25%로 1조원 규모. 곧 40%를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 이후 유행하고 있는 ‘러닝 붐’이 한국에도 일었다. MZ 세대를 중심으로 러닝화가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으면서 수요가 크게 늘었다.
‘러닝화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브랜드가 등장했지만 특히 온러닝·호카·살로몬 세 브랜드의 약진이 돋보인다. ‘밑창에 구멍 숭숭 뚫린 운동화’로 유명한 온러닝(On Running)은 신드롬급 인기. 스위스 출신으로 철인 3종 경기를 6번 우승한 올리비에 베른하르트가 2010년 설립했다.
잦은 부상에 시달리던 베른하르트는 착지 시 충격을 줄여주는 동시에 추진력은 제공하는 운동화를 꿈꿨다. 그는 신발 밑창에 정원 호스를 잘라 덧댄 시제품을 만들어 자신의 후원사였던 나이키를 찾아갔다. 못생긴 디자인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 물건을 나이키는 단칼에 거절했다.
베른하르트는 전략 컨설턴트와 듀폰 엔지니어였던 두 친구와 회사를 세웠고, ‘프랑켄슈타인 시제품’을 발전시켜 ‘클라우드텍’을 내놓았다. 러너들 사이에서 ‘구름 위를 달리는 기분’이라는 입소문을 탔다. 로저 페더러가 투자는 물론 제품 개발에도 참여한 테니스화 ‘더 로저’도 성공했다. 온러닝은 15년 만에 글로벌 운동화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자리 잡았다.
호카(Hoka)는 2009년 편안하고 기능적인 트레일 러닝화를 고민하며 시작된 브랜드. 험난한 지형에도 충격을 잘 흡수하도록 밑창(아웃솔)을 당시로서는 “과하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부풀렸다.
호카 러닝화는 “못생겼지만 쿠션감과 충격 흡수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으며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미국 울트라 마라톤 선수 칼 멜처 등 호카가 후원한 선수들이 기록을 경신하고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인기. 국내에서는 중장년층도 “무릎과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며 즐겨 신는다.
살로몬(Salomon)은 러닝화를 내놓은 지 얼마 안 됐지만 1947년 설립된 유서 깊은 프랑스 스포츠 브랜드. 스키와 스키화를 연결하는 바인딩을 만들다 아웃도어 용품으로 영역을 넓혔다. 등산화를 기반으로 한 전술화로 명성을 얻었다. 미국과 유럽 특수부대원들이 즐겨 신는다.
살로몬은 등산화와 전술화를 통해 쌓은 전문성과 기술력을 기반으로 1990년대 트레일 러닝화를 내놓았고, 아웃도어 마니아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고프코어(투박하고 못생긴 아웃도어 패션) 트렌드를 타고 MZ 세대에게 패션 아이템으로도 사랑받고 있다.
◇나이키는 어쩌다 부진에 빠졌나
인기를 얻은 신규 브랜드들은 디자인은 투박하지만 기능성과 착화감이 우수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나이키는 이들과 정반대 길을 가다가 부진의 늪에 빠졌다.
지난해 6월 발표된 나이키의 회계연도(2023년 6월~2024년 5월) 매출은 513억6200만달러로 전년 대비 0.3% 증가에 그쳤다. 2025 회계연도 분기(2024년 6~8월) 매출은 전년 대비 10% 감소한 115억9000만달러. 나이키 주가는 20% 가까이 떨어졌다. 1980년 상장 이후 최대 하락 폭이었다. 최고경영자(CEO)도 교체됐다.
나이키는 기능성보다 디자인과 패션에 집중했다. 한정판 운동화를 쏟아냈다. 2019년 지드래곤과 협업한 운동화는 리셀가(중고 판매가)가 1300만원까지 치솟았다. 나이키코리아는 코로나로 국내 패션 업계가 불황이던 2020년 최대 실적을 올렸다. 2022년에는 스포츠 브랜드 최초로 단일 매출 2조원을 달성했다.
분위기는 2023년부터 반전됐다. 한정판 운동화 인기가 시들해졌다. 트렌드는 못생기고 투박해도 편하고 기능성 뛰어난 러닝화로 바뀌었지만, 나이키는 혁신적 신제품을 내놓지 못하며 시장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과거 ‘혁신의 대명사’ 나이키는 러닝 문화 붐을 놓쳤다”며 “시장점유율을 내주며 매출이 침체되고 있다”고 했다.
나이키의 라이벌 아디다스는 부진을 겪다가 최근 부활했다. 레트로(복고) 유행에 맞춰 삼바, 가젤 등 과거 제품을 재해석해 출시했다. 러닝, 테니스 등 인기 스포츠에 맞춰 제품 라인업도 강화했다.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흑자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