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성을 샀다며 해외 배송 온 문서를 자랑하고 있다.”
이런 글이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됐다. 성(姓)을 사고 판단 말인가. 게다가 해외 성씨? 자녀 이름도 ‘김순자’에서 ‘순자 존슨’으로 바뀌는 셈이니 혼란스러울 만도 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이상하다. “성은 250만원이고 50만원은 남작 작위라며 아빠가 자꾸 남작으로 불러 달라고 한다.” 성(城)을 샀다는 말이었다. 이 아버지는 결국 밤 11시에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에게 집에서 쫓겨났다고.
매관매직이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해외 귀족 작위다. 구매하면 귀족 등록 증서까지 보내준다. ‘이말년 시리즈’로 유명한 만화가이자 유튜버 침착맨(본명 이병건)은 지난달 듣도 보도 못한 나라의 남작 작위 구매 과정을 담은 영상을 올렸다. 구독자 277만명이 그를 “남작 병건”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순진한 우리 국민이 사기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데 진짜 있었다. 국가라 부르기도 애매한 그 국가가.
◇영국판 봉이 김선달일까
우리 돈 4만5000원만 내면 누구나 영주나 아가씨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칭 독립국’ 시랜드 공국(Principality of Sealand) 이야기다. 남작·남작 부인 작위는 9만원, 백작·백작 부인은 45만원…. 공작·공작 부인 작위가 가장 비싸다. 112만3000원. 유럽 귀족제에서는 공작이 왕족 다음으로 높다.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정1품’ 정도. 기념 주화나 A4용지 1장짜리 헌법 전문도 판매.
시랜드 공국은 영국 동해안 도시 입스위치에서 11㎞ 떨어진 바다 한복판에 있다. 거주 인구 31명(추정), 정치 체제는 입헌군주제, 화폐는 시랜드 달러, 남북한 미수교(?). 두 콘크리트 기둥에 철제 구조물을 얹은 형태의 요새가 영토를 대신한다. 농구 코트 둘 정도 면적.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건설한 해상 요새 중 하나다.
그런데 1967년 9월 2일 영국군 소령 출신인 패디 로이 베이츠라는 사람이 이곳을 점령하고 독립국가를 선포한다. 아내 생일과 같은 날이라 생일 선물이었다는 추정이 있다. 영국 해군은 강제 퇴거를 시도했으나 이듬해 영국 법원이 “시랜드는 공해상에 있어 영국 법률을 적용받지 않는다”고 판결, 충돌은 일단락된다.
시랜드 공국은 현재까지도 국제적 독립국가로 인정받지 못한다. 심지어 1982년 해양법에 관한 유엔 협약이 채택돼 영국 영해에 속했다. 그러나 베이츠 일가는 “우리는 정식 국가로 인정받은 독립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근거는 이렇다. 1978년 한 용병 집단이 “카지노를 만들겠다”며 시랜드 공국을 습격하는데, 이들 중 독일인 일부가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독일이 외교관을 보내(!) 국가 대 국가로 석방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실재한 일이다.
◇특별한 정체성 갈망
“이걸 누가 사나” 싶지만 영국 BBC는 2015년 “불분명하지만 시랜드 공국의 GDP는 60만달러 정도”라고 했다. 한화로 약 8억8100만원, 영주·아가씨 작위로 따졌을 때 연간 세계 1만9500여 명이 사는 셈이다.
국내에서도 1~2년에 한 명꼴로 “작위를 샀다”는 사람이 인증 사진과 함께 등장한다. 로스쿨에 다닌다고 소개한 한 블로거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오랜 환상을 성취했다”고 말했고, 한 프리랜서 작가는 “귀족 신분으로 언젠가 저 땅을 밟아보고 싶다”고 했다. “귀족 작위를 받는다는 꿈 하나를 달성했다”는 사람도 있다.
전문가들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불러온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만큼은 진짜 귀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현실에서 얻기 힘든 권위와 신분에 대한 체험 욕구를 채운다는 것.
스코틀랜드의 한 마케팅 업체는 회사 사유지인 에들리스턴 지역 고지대의 땅을 ‘판다’며 “영토 사고 영주(Lairds·귀족) 칭호도 얻으라”고 홍보한다. 약 0.2평에 350달러(약 51만원). 판매 금액 일부는 그 땅에 나무 심는 데 쓰인다. 증서는 발급하지만 법적 효력이 없다.
어디다 쓰냐고? 영토를 산 사람들은 비행기 탑승권이나 호텔 예약 때 선택할 수 있는 호칭으로 ‘미스터(Mr)’ ‘미스(Miss)’ ‘닥터(Dr)’ 등 대신 ‘로드(Lord·귀족)’를 택한다. 인증 사진을 찍어 올린다. 인하대 이은희 소비자심리학과 교수는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한 정체성을 갈망하는 인간의 심리를 파고든 일종의 비즈니스”라며 “결국 명품으로 ‘고급이라는 환상’을 소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