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원주의 산중에 ‘뮤지엄 산’(Museum SAN)은 자리하고 있다. 드높은 산, 이름값을 한다. 코로나가 휩쓴 시기에도 관람객이 늘었다. 2019년부터 20만명을 넘어서더니 이제는 연간 37만명이 방문하는 명소가 됐다. MZ세대의 전폭적 사랑을 받는 성소로 말이다. 여름이면 패랭이꽃이 만발한 분홍 정원을 보기 위해, 겨울이면 흰 눈 속에서 자태를 뽐내는 자작나무 군락지를 보기 위해 젊은이들이 몰려든다. 이곳 입장료는 결코 만만치 않다. 통합권은 성인이 4만6000원을 내야 하는 비싼 미술관이다.

하늘에서 바라본 봄날의 뮤지엄 산 전경. /뮤지엄 산

그런데도 사람들은 ‘뮤지엄 산’에 간다. 철철이 바뀌는 자연의 변화무쌍함, 물과 빛과 돌로 빚어진 건축물, 그 안에 놓인 예술품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고 그곳에 간다. 그 중심에 청조(淸照) 이인희(1929~2019)가 있다. 평생에 걸쳐 미술품을 모았던 열정의 컬렉터. 기업을 이끌었으나 그저 ‘고문’이라 부르기를 원한 여성. 사재를 털어 재단을 세우고 자신의 수집품 1290점을 기증해 한국에서 가장 자연 친화적인 미술관을 완성한 사람.

◇삼성 창업주의 맏딸

생전의 이인희(오른쪽) 고문과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 /뮤지엄 산

이인희는 1929년 1월 30일 이병철과 박두을의 장녀로 태어났다. 여러 사업을 구상하며 실패를 거듭한 아버지, 결국 고난을 극복해 조선 땅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돼가는 아버지, 동시에 회화·조각·도자기 등 한국 미술에 관심을 쏟고 모으던 아버지를 어린 딸은 가장 가까이서 보며 자라났다. 훗날 ‘국내 1세대 여성 컬렉터’의 자질을 쌓는 계기였다. 이후 대구여중·경북여고를 졸업한 뒤 이화여대 가정학과에 입학해 상경했으나, 그 역시 이른 결혼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랬던 그가 삼성 경영 일선에 등장한 건 나이 오십을 넘겨서다. 이병철 삼성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인희를 가리켜 “사내로 태어났으면 그룹을 맡겼을 큰 재목인데…”라 했을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아무튼 이인희는 1979년 호텔신라 상임이사로 선임됐고, 1983년에는 전주제지 고문으로 추대됐다. 당시 제지는 알짜 사업이었다. 전주제지는 신문 용지를 제작했는데, 신문 보급률이 늘면서 종이 수요가 급증해 굴지 제지 회사가 됐다. 1991년 전주제지는 삼성그룹에서 독립하고 이듬해 사명을 한솔제지로 바꿨다. ‘큰 소나무’라는 뜻의 순한글 이름.

국내 30대 그룹에 진입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IMF 외환 위기가 왔다.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이 불가피했다. 그룹의 핵심 영역이던 제지 사업을 일부 매각했다. 그럼에도 문화 사업의 꿈을 놓지 않았다. 그 계획의 정점에 ‘뮤지엄 산’이 있다. 그룹의 부침만큼이나 미술관 건립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1994년 건립 승인이 떨어졌지만 2005년에 이르러서야 건축가와 접촉할 수 있었다. 2008년 기공식을 열었지만 이듬해 세계 금융 위기가 터졌다. 공사가 중단됐다. 우여곡절 끝에 당초 계획보다 2년 늦은 2013년 5월 ‘뮤지엄 산’은 개관했다.

◇안도 다다오와의 만남

개관 10주년이던 2023년 미술관 입구 앞에 놓인 안도 다다오의 사과 조각 '청춘'이 푸릇푸릇하다. /뮤지엄 산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뮤지엄 산’의 건축가는 일본의 대표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84)다. 이인희는 미술관 설계를 맡길 걸출한 건축가를 직접 찾아나섰고, 2005년 오사카에서 안도를 만났다. 현재 ‘뮤지엄 산’을 운영하고 있는 안영주(삼남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의 아내) 관장은 “처음에 안도 다다오의 반응이 긍정적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미 자신이 일본에 미술관을 너무 많이 지은 데다,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이 많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인희는 “사람들이 오게 하는 건 우리 역할”이라며 “세상에 없는 미술관을 만들어 달라”고 설득했다.

결국 안도는 부탁을 수락하면서 자신의 요구를 모두 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예를 들어 미술관 내·외부에는 어느 공간에서도 전선이 드러나는 경우가 없다. 노출 콘크리트를 주재료로 미니멀한 공간 창출에 진력하기에 모든 전선을 벽 안에 들이는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매끈한 벽면을 위해 건설팀은 벽면을 몰드로 뜬 다음 내부로 들여와 조성하는 고난도 작업을 수행했다. 외부 벽면을 구성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안도는 건축물 외부에 10개 정도 벽을 설정하고 이를 잘게 절단한 ‘파주석’으로 채우는 계획을 세웠다. 돌이 단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과감히 버리는 과정이 반복됐다. 수변 공간에 충남 서산의 해미석을 사용한 것도, 플라워 가든에 패랭이꽃 군락지를 만든 것도 모두 그런 심사숙고 결과였다.

사람과 대지와 하늘을 연결하는 명상의 공간 '삼각 코트'. /뮤지엄 산

훗날 안도는 미술관을 찾아 “이인희 고문은 의욕과 열정의 표상이었다”고 회고했다. 부지 2만2000평, 미술관 완공까지 8년.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에 둘러싸이는 아늑함’을 구현한 공간이 완성됐다. 안도 자신도 그 만듦새에 만족해 개관 이후 일본 건축가 200여 명을 이끌고 재방문할 정도였다. 안도는 개관 5주년에는 ‘명상관’ 설계도를, 10주년에는 ‘빛의 공간’을 위한 설계도를 추가로 선물했다. 두 공간은 모두 실물로 완성됐고, 수많은 관람객에게 정신적 치유의 체험을 선사하는 명소가 됐다.

◇종이 회사가 세운 종이 박물관

박수근 '산책'. /뮤지엄 산

사실 ‘뮤지엄 산’은 1997년 전주에 설립된 ‘한솔종이박물관’을 모태로 한다. 국내 최초였던 종이 박물관의 기존 활동에 이인희의 개인 소장품으로 구성된 ‘청조 컬렉션’이 더해지며 지금의 미술관은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인희가 기울인 종이에 대한 관심은 ‘뮤지엄 산’이 보유하고 있는 소장품 영역을 수채화와 판화까지 넓혔다. ‘산의 화가’ 박고석의 수채화 500점, 판화가 황규백의 전작 200점 등이 그 증거. 언젠가 대규모 전시로 기획할 작품들이다. 이곳이 자랑하는 박수근의 ‘사람들’과 ‘산책’도 모두 종이에 그린 작품이라는 점도 그의 종이 사랑을 되돌아보게 한다.

‘뮤지엄 산’이 보유한 가장 중요한 유물은 국보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이다. 영인본이 전시돼 있다. 한지로 만든 다양한 전통 공예품뿐 아니라, 종이의 기원을 알리는 파피루스(papyrus) 온실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관람객이 체험할 수 있는 판화 공방도 운영하고, 2017년부터 매년 판화 공모전도 진행한다. 이 공모전을 통해 지금까지 청년 판화가 16명이 발굴돼 개인전을 치렀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수호자

이중섭 1956년작 '나무와 달과 하얀 새'. 마른 나뭇가지와 창백한 달빛, 약하게 날갯짓하는 새들이 이중섭의 마지막 시간을 드러낸다. /뮤지엄 산

‘빛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의 기념비적 조형물로 이뤄진 ‘터렐관’은 유명한 사진 명소다. 어떤 붓질 없이 오로지 빛만으로 새로운 차원의 공간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터렐관에 입장하면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스카이 스페이스’는 가로 5m, 세로 4m 타원형 구멍이다. 하늘을 향해 뚫린 구멍, 내부에 설치된 인공 조명이 간섭해 시간에 따라 빛이 오묘하게 변화한다. 대기 조건에 따라 변화무쌍한 빛의 향연을 보여준다. 종국에는 ‘빛으로의 여정’을 통해 ‘내면의 빛’과 만나게 되는 독특한 이 체험 공간을 위해, 이인희는 미국 애리조나로 날아가 제임스 터렐의 스튜디오에서 설계 회의까지 했다.

그럼에도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작품을 수집했다는 점이다. 박수근·김환기·유영국·장욱진…. 이중섭은 ‘아이와 물고기와 게’ 같은 수채화부터 그가 절명한 해에 그린 ‘나무와 달과 하얀 새’ 같은 중요작까지 아우른다. 비디오 아트 창시자 백남준에 대한 애정도 깊어 ‘백남준관’을 따로 마련했다. 이인희는 미술관 개관 이듬해 “1970년 우연히 들른 한 화랑에서 도상봉의 아름다운 장미 그림을 발견했다”며 “즉시 그 그림을 구매했고 그때부터 국내 생존 예술가들에게 집중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했다. “한국의 정체성과 역사를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쾌대 1948년작 '군중2'. /뮤지엄 산

특히 이쾌대의 ‘군상2’ ‘무녀’ ‘고통’은 이쾌대 연구에 필수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식민지 시기, 한국적 리얼리즘의 금자탑을 이룬 불운한 천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수작이기 때문이다. 월북한 탓에 1988년 해금 조치 이후에야 작품의 존재가 알려진 일련의 작품을 구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거액을 선뜻 건넸다는 이야기를 안영주 관장이 귀띔해 주었다. 이인희 고문의 안목과 과감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가 애써 모은 소장품은 한국 근대미술을 재조명하는 여러 주요 전시와 연구에 자주 활용됐다. 컬렉터의 노력 덕에 결락된 우리 미술사가 하나둘 채워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