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이판 마라톤에 공룡 옷을 입고 뛴 참가자. /오주비 기자

마산에서 태어나 거제도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바다를 옆에 두고 커서 그런지, 어른이 돼서도 산보다는 바다가 좋다. 대한민국 동·서·남해를 넘어 새로운 바다를 보게 될 생각에 출국을 앞두고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더 간지러운 곳은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다리였다.

‘안 씻어서 간지러운 거 아니야?’라는 오해는 넣어두시길. 기자는 4월이면 3년 차 러너가 된다. 화려한 서울 야경 속을 달리는 ‘시티런’이 조금씩 질리던 차에, 사이판으로 인생 첫 해외 마라톤을 가게 된 것이다. 건물과 인파로 빽빽한 대도시와는 정반대인 사이판에서 자연을 만끽하며 달린다니!

근질거리는 다리도 풀 겸 서울에서보다 일찍 일어났다. 사이판을 달리려면 새벽 기상은 필수. 낮은 해가 뜨겁고, 밤은 어두워서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사이판 도착 둘째 날인 지난 6일 오전 5시 45분.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숙소를 나섰다. 태양 아래선 느낄 수 없던 선선한 바람이 코로 들어왔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숙소(이랜드켄싱턴호텔) 정문부터 만세 절벽까지 6km 코스를 두 다리로 달렸다. 초록색 풀과 나무, 점점 붉어지는 황금빛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파란 바다가 끝없이 이어졌다. 호흡은 갈수록 거칠어져도 달리는 동안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지난 6일 사이판 이랜드켄싱턴호텔~만세 절벽 코스를 달리는 기자. /오주비 기자

셋째 날에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코스를 달렸다. 이번엔 서울 강남구의 한 러닝 아카데미 팀과 함께했다. 그들도 기자처럼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사이판을 찾았다. 호텔 앞 파우 파우 비치에서 몸을 푼 뒤, 만세 절벽 방향으로 뛰는 동안 김자경(48)·이윤정(46) 부부와 친해졌다. 이번이 인생 첫 마라톤 도전이라는 남편 김자경씨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데, 아내 따라 사이판에 달리러 왔다”고 했다.

이 부부는 올해 결혼 20주년을 기념으로 사이판 마라톤에서 10km씩 달렸다. 둘이 합쳐 20km를 뛴다는 것만으로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웬걸. 마라톤 당일인 8일,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음에도 ‘10km 남녀별 랭킹’(45위)과 ‘10km 남녀별 45~49세 랭킹’(4위)이 똑같았다. 역시 부부는 일심동체인가. 아내 이윤정씨는 “사이판 마라톤에서 평생 기억할 결혼 20주년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며 웃었다.

그런데 이날 기자도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았다. 1시간 3분 52초의 기록으로 ‘10km 여자 19~34세 랭킹’ 10위에 오른 것이다. 10km를 55분 57초에 완주한 2023년 춘천마라톤(여자 랭킹 481위)을 생각하면 뜻밖의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이판 마라톤에서 더 좋았던 건 ‘여유로움’이었다. 급수대를 지키는 봉사자들의 “굿모닝” 인사, 러너들이 결승선에 들어올 때 팽팽한 피니시 라인을 느끼게 해주는 주최 측 배려 등등. 등록 인원은 612명(220명이 한국인)이지만 그 숫자보다 큰 축제 분위기를 체감했다.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마라톤 출발·도착 장소인 마이크로 비치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주비 기자

2000달러를 받은 한국인도 나왔다. 42.195km를 3시간 33분에 완주해, 풀코스 여자 전체 2등에 오른 6년 차 러너 김윤진(33)씨. 한 달에 250km를 달리는 고수 러너인 그는 개인 최고 기록에 행복해하며 숙소로 가던 도중, 관광청에서 “상금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한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정말 놀랐어요. 주위 러너들한테 ‘사이판 마라톤 가 보라’고 추천해 주고 싶습니다.” 김윤진씨를 포함해 한국인 러너 19명은 각자 참가한 코스에서 남녀별 전체 랭킹 또는 남녀별 나이대 랭킹 1~3위를 차지했다. 무엇이든 어디서든 진심인 한국인이 해외 마라톤까지 평정한 것 같아 뿌듯했다.

딱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마라톤을 뛰는 동안 사이판 바다를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든 코스에서 바다를 보며 달릴 수 있다는 게 사이판 마라톤의 가장 큰 묘미겠거니 했건만. 아쉬운 마음에 관광청에 물어보니 작년과 올해는 도로 공사 때문에 5km와 10km 코스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공사는 올해 끝날 예정이니 내년엔 눈에 바다를 담으며 달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소식도 함께.

나 원 참! 사이판 마라톤을 온전히 경험한 게 아니었다니. 다시 사이판에 와야 할 이유가 생겨 버렸다. ‘내년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하나’ 행복한 고민에 또 그 증상이 시작됐다. 다리가 근질거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