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다시 논의해야 한다.”
지난달 22일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소셜미디어에 쓴 글이다. 민주당이 현 정부를 비판하는 단골 메뉴 중 하나는 대통령이 재의요구권, 일명 거부권을 남용했다는 것. 그 말대로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으로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기 전까지 거부권을 25번 행사했다. 그 뒤 한덕수 권한대행이 6번, 최상목 대행이 9번 거부권을 행사했으니, 현 정부 3년간 행사한 거부권 횟수는 무려 40번에 달한다. 87 체제 이후만 따지면 단연 1등인데, 2등이 노태우(7번) 대통령인 것을 보면, 확실히 거부권 행사를 많이 하긴 했다.
하지만 거부권 행사는 대통령에게 주어진 헌법상의 권리. 따져봐야 할 것은 횟수가 아니라 그 행사가 정당한지 여부다. 윤 대통령의 원칙은 여야 합의가 안 된, 다수당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법안에는 거부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거부권 행사가 잦았다는 건 민주당과 야당이 의석수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법안을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대통령의 재의 요구 대상에는 불법 파업을 무제한으로 할 수 있게 만드는 ‘노란봉투법’, 공영 방송을 영원히 좌파의 지배하에 두겠다는 ‘방송 4법’ 등 국민의힘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법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1년 가까운 논의 끝에 여야가 합의한 법안. 이를 거부하려면 이 법안이 천하의 악법이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사람은 나이가 들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노년의 빈곤 문제를 개인에게 맡기는 건 너무 위험한지라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데, 전 세계 170여 국에서 시행하는 노후 보장책이 바로 국민연금이다. 젊었을 때 일정 금액을 내게 한 뒤 은퇴 후 이를 돌려주는 시스템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근로자 수 10인 이상인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행한 것이 최초다. 그 후 농어촌과 도시 지역 주민까지 범위를 넓혔고, 2006년에는 1인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함으로써 공무원과 군인, 사립학교 교원 등 따로 연금을 적립하는 집단을 제외한 전 국민이 국민연금의 대상이 됐다.
국민건강보험이 그랬듯이, 국민연금도 시작이 어려웠다. 안 내던 돈을 내라니 반발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심지어 ‘세금을 더 받아내려는 수작’이라는 괴담이 퍼지기도 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정부는 내는 돈의 비율(보험료율)을 최소로 하고, 받는 돈의 비율(소득대체율)을 높게 책정할 수밖에 없었다. 효과는 극적이었다. 연금 수령자들에 따르면 ‘소득의 겨우 3%를 몇 년간 연금으로 냈더니 젊을 때 벌던 돈의 70%를 남은 평생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연금을 반대하다니!’라며 반성하는 이들이 속출한 것은 당연한 일. 문제는 좋은 시절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연금을 받아야 하는 노년층이 증가한 반면,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돈을 내야 할 이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2050년쯤 되면 국민연금이 고갈돼, 그 이후 노년에 접어드는 이들은 국민연금을 받을 수 없다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런 불신은 특히 젊은 층에서 커져만 갔다.
역대 정부가 국민연금의 고갈을 막기 위해 고심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방법은 딱 하나, 내는 돈의 비율을 높이고, 받는 돈의 비율을 낮춰 고갈 시점을 뒤로 미루는 것뿐이었다. 당장은 욕을 먹을지언정, 역대 정부는 이 일을 그럭저럭 해냈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보험료율을 9%로 높이고 소득대체율을 60%로 낮췄다. 노무현 정부도 국민연금 개정안을 만들었지만 여야 합의가 불발돼 진통을 겪었는데, 결국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에 보험료율은 그대로 두고 소득대체율만 2008년에는 50%, 그 이후부터 매년 0.5%포인트씩 줄여 2028년에는 40%가 되도록 하자는 개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40%의 소득대체율은 미국과 독일, 일본 등등 다른 OECD 국가와 비슷한 수준. 그래서일까.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역시 고갈 위기에 직면한 공무원연금 개혁에 집중하는데, 특히 고위직 연금을 깎는 대신 하위직은 덜 깎고, 지급 시기를 60세에서 65세로 변경한 박근혜 정부의 개정안은 좌파 인사인 유시민조차 “참여정부 때 개혁안보다 더 강력하다”고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공무원 노조가 반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문재인이 이들에게 놀아났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찬성하는 대신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다시 50%로 높이자”는 황당한 주장을 함으로써 여야 합의를 방해했다. 더 가공할 일은 그랬던 문재인이 2017년 5월,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는 국민연금을 손보는 것. 앞선 두 차례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2057년이면 국민연금이 바닥날 것이란 전망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018년 11월, 정부가 ‘조금 더 내면서 지금처럼 받든지, 더 받고 더 내든지’라는, 지극히 당연한 국민연금 개혁안을 발표하자 문재인은 특유의 ‘격노’를 선보인다. 보험료 인상이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것. 정부가 노력해서 만든 안을 대통령이 질타하는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대통령 말대로 ‘덜 내고 더 받는 기적의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문재인은 국가가 국민연금 지급 보장을 법으로 명문화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는데, 이 경우 지급해야 할 연금이 국가 부채로 잡혀 국가 신용도가 낮아진다! 그 이후 문재인은 국민연금 개혁을 국회에 미룬 채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해 버린다.
2024년 9월, 윤석열 정부는 내는 돈을 9%에서 13%로 올리고 받는 돈을 40%에서 42%로 늘리는 개혁안을 만든다. 특히 나이에 따라 보험료율 인상에 차등을 둔 게 이 안의 핵심. 50대는 보험료율을 매년 1%포인트씩 인상해 2028년에 13%가 되지만, 20대는 0.25%포인트씩 인상해 2040년에야 13%가 되는 식이다. 젊은 층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해진다는 뜻. 민주당과의 합의 과정에서 소득대체율이 43%로 높아지는 바람에 연금 고갈 시점이 2064년으로밖에 늦춰지지 못한 건 아쉬운 점이지만, 향후 정부마다 추가적인 개편을 한다면 근근이 유지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정부안 발표 당시 여당 대표였던 분이 그 어려운 여야 합의가 이루어진 이때, 연금 개혁안을 비판하고 나선 건 아쉬운 대목이다. 혹시 그는 연금의 지속성보다, 다가온 조기 대선에서 청년표를 얻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