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리스본 가파른 언덕길을 누비는 낡은 노란색 트램은 사람 냄새 가득했다. 한 량짜리 28번 트램에서 만난 포르투갈 할머니는 괄괄한 여장부였다. 노약자석 표시를 가리키면서 금발 관광객들을 뒷자리로 쫓아냈다. 가방을 두고 내린 승객이 소리치며 트램을 쫓아오고, 창문으로 그 가방을 던져주는 풍경이 빛바랜 그림엽서처럼 정겹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스위스 베른에서 평생 고전학을 가르쳐 온 고지식한 인물이다. 세상을 책 읽는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던 책벌레였다. 글로 ‘묘사된 들판은 원래의 초록빛보다 더 푸르다’고 믿는 그를 아내는 ‘지루하다’며 떠나버렸다.

출근길에 만난 미지의 포르투갈 여인과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포르투갈 책이 그레고리우스를 뒤흔든다. 그는 홀린 듯 직장을 벗어나 리스본으로 떠난다. 독자인 우리는 그레고리우스를 추적하고 그레고리우스는 ‘언어의 연금술사’ 저자 프라두를 추적하는 액자소설이 ‘리스본행 야간열차’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살라자르(총리 재직 1932~1968) 독재 치하 의사이자 작가였음을 알게 된다. 자기 병원에 실려 온 ‘리스본의 도살자’ 비밀경찰 두목을 살려 시민들의 질타를 받던 프라두는 반정부 운동에 투신, 운명의 여인 에스테파니아를 만난다. 격동의 포르투갈 현대사와 사랑과 우정, 배신이 교차하고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 직전 프라두가 뇌동맥류 파열로 급사한다는 줄거리다.

리스본에서 나는 조르주성 아래 묵었다. 바다처럼 넓은 테주강과 리스본 시내를 내려다보는 조르주성의 밤은 은은한 조명으로 요염하다. 성 아래 전망대는 바로 리스본에서 보낸 첫날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를 찾아 나선 곳이었다.

뜨겁고 충만했던 프라두 삶의 자취를 쫓으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차갑고 공허한 삶에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삶의 그 나머지 부분을 찾아 리스본에 온 그레고리우스는 응답받았을까?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었던 것처럼 나도 오랫동안 리스본행을 꿈꿨다.

리스본 언덕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다. 내부 수리차 1년 반 문을 닫는 세계 유수 개인 컬렉션 굴벤키안(C. Gulbenkian) 박물관을 폐장 이틀 전 만났다. 천문학적 사재를 들여 ‘예술은 인류 보편의 언어’임을 증명한 굴벤키안 컬렉션과 정원이 나를 압도했다. 재래시장에선 신선한 과일을 가득 사도 2만원이 되지 않았다. 소박한 리스본 식당 해물밥과 문어밥에 매료되었다.

포르투갈은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열어 세계사를 다시 쓴 나라다.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 항로를 처음 개척한 함선 4척, 선원 170명의 바스쿠 다 가마 일행 중 2년 후 리스본으로 생환한 건 함선 2척, 선원 55명에 불과했다. 국운과 생명을 걸고 떠난 대장정이었다.

유럽 변방 약소국의 운명을 불굴의 의지로 돌파한 대항해시대를 다룬 해양박물관에서 나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리스본 대지진(1755년)과 살라자르 장기 독재를 이겨낸 포르투갈 사람들. 세계 최고(最古) 서점(1732년 창업)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에그타르트 가게가 공존하는 리스본 거리. 낡았지만 인간미 넘치는 풍경이 정겨웠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한국인의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포르투갈 여행은 깊은 ‘자아 찾기의 길’이다. 머나먼 이국에선 나 자신과 조국(祖國)의 얼굴이 오히려 잘 보인다. 충만한 여행이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처럼 우리도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